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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아침부터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 노숙인 거리상담사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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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5일 서울역 일대 순찰
도움 위해 '관계 형성'이 중요

[아시아경제 최태원 기자] 15일 오전 9시20분께 서울역 광장 인근 지하철 환풍구 위. 이른 시간부터 과자를 안주 삼아 페트병 소주 두 병을 마시고 있는 이들을 향해 14년 경력의 문민수 노숙인 거리상담사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노숙인들의 술자리에 역정을 내려는가 싶던 찰나, 흠칫 놀란 술판을 벌이던 6명의 노숙인은 이내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며 상담사에게 술잔을 권했다. 쌀쌀한 날씨 탓에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이들은 오랜 친우를 만난 듯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날도 추운데 왜 아침부터 술을 드세요. (술잔을 거절하며) 전 괜찮아요.” 상담사가 익숙하게 말을 걸자 술잔을 권한 노숙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빨리 따뜻한 곳으로 가세요”라며 곧 자리를 뜬 문 상담사는 기자에게 “절대 강압적으로 하면 안 된다. 그럼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서 도와드리기 더 힘들어진다”고 설명했다.

15일 오전 9시50분께 문민수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거리상담사가 서울역 1번출구 방향 개찰구 주변에서 쓰러져 자고 있던 노숙인을 휠체어에 태우고 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15일 오전 9시50분께 문민수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거리상담사가 서울역 1번출구 방향 개찰구 주변에서 쓰러져 자고 있던 노숙인을 휠체어에 태우고 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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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영하 2도까지 떨어진 이날 오전,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이하 센터)’ 노숙인 거리상담사들은 서울역과 서울역 외곽, 인근 지하도, 용산역 등으로 노숙인 거리 상담에 나섰다. 센터 거리상담팀은 30명의 직원 상담사와 일부 자원봉사자들로 이뤄졌다. 이들은 주간·야간·심야로 조 나눠 1년 365일 서울역 일대 순찰한다. 노숙인 관리의 일환으로 시설 보호를 꺼리는 거리 노숙인들의 상태를 살피는 것뿐 아니라 시설 및 자활 사업 연계, 치료가 필요할 경우 병원까지 연계 등이 목적이다. 센터에서는 현재 150~170여명의 서울역 인근 거리 노숙인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역 광장 인근을 순찰한 문 상담사는 서울역 파출소 쪽으로 향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걷던 중 얇은 비닐 외투를 입고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한 여성 노숙인을 발견하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노숙인 근처에 도착하자 짐짓 우연히 본 척하며 “여기서 뭐 하세요? 커피 드셨어요? 지난번처럼 센터에 가서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시죠. 그때 재밌었잖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여성 노숙인이 커피를 이미 먹었다며 “미안해서 어떡해. 항상 도와주시고…”라며 말끝을 흐리자, 더는 재촉하지 않고 “그러시면 이따 점심 드시고는 꼭 오세요. 아셨죠? 오실 때마다 제가 커피 대접은 책임질게요”라고 전한 후 발길을 돌렸다.


그는 거리상담사들이 노숙인들을 도울 때 가장 중요시하는 건 ‘관계 형성’이라고 했다. 친숙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노숙인들이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문 상담사는 “관계를 쌓는 데에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이 걸린다. 방금 이야기 나눴던 여성 노숙인분도 처음엔 말을 걸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다. 보통 따뜻한 곳에서 차 한 잔 하자며 센터로 데리고 가 이야길 나누며 관계를 쌓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말 위급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반강제적으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긴 한다. 하지만 그 후엔 반감이 굉장히 커진다”면서 “숨만 쉬어도 고통이 있을 정도로 천식이 심한 노숙인 한 분을 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다. 퇴원하신 후부터 저와 제대로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15일 오전 10시10분께 문민수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거리상담사가 서울역 인근의 한 노숙인 텐트에서 노숙인의 안부를 살피고 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15일 오전 10시10분께 문민수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거리상담사가 서울역 인근의 한 노숙인 텐트에서 노숙인의 안부를 살피고 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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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중 돌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전 9시50분께 서울역 1번 출구 방향 개찰구 주변에서 관리 명단에 없는 처음 보는 쓰러진 노숙인을 발견한 것이다. 황급히 다가가 상태를 살핀 문 상담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술을 많이 드셨네요. 추운데 왜 여기서 주무세요. 따뜻한 곳으로 모셔다드릴게요”라며 센터에 휠체어를 가져다 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그는 “처음 뵙는 분이라 우선 센터에서 술이 깨실 때까지 보호한 후 상담을 통해 상태를 확인한 후 필요한 기관으로 연계해드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1시간30분가량의 동행 취재가 끝나갈 무렵, 문 상담사는 조심스레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응급대피소들이 임시 폐쇄되며 노숙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센터 대피소에만 겨울이면 150여명이 계셨는데, 지금은 이 일대에 총 150여명뿐”이라고 했다. 아울러 “어디 계실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명동과 한강 고수부지 등까지 순찰 범위를 늘리고 있긴 하지만 어려움이 있다”면서 “하루빨리 대피소가 다시 열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최태원 기자 skk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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