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TV+ ‘파친코’ 속 눈여겨볼 키워드
의료보험 등 각종 권리 박탈, 집도 취업도 불가능한 삶
내셔널리즘으로 뭉친 공동체...한국과 일본 적대시 속 외면
과거를 벗어나려는 솔로몬, 선자와 이해·화합 통해 성장

[이종길의 영화읽기]선택지 없는 자이니치 삶, 역사의 격랑 견뎌낸 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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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TV+ 시리즈 ‘파친코’는 4대에 걸친 험난한 가족사를 선자(김민하·윤여정)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로 이주하는 여성이다.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고통의 궤적은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삶을 치열하게 극복해가는 자이니치(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를 대변한다. 게임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파친코의 속성과 닮아있다.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박소희)는 파친코의 핀을 조정하며 설명한다.

"대부분 레버를 잘 당기면 파친코가 터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손님들은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없어. 우리도 마찬가지고. 핀을 조정하는 건 확률을 조작하는 게 아니야. 그냥 살짝만 움직이는 거야. 하지만 ‘욕심부리지 마라’가 고토씨의 입버릇이었어. 손님들이 잃으면 같이 아파하고, 따면 같이 기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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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자이니치의 삶을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본은 패전 뒤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모든 기본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자이니치는 1961년 만들어진 국민의료보험, 국민연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인이 아니라서 집을 빌리지 못했고, 취직할 수도, 공무원이 될 수도 없었다. 고국인 한국의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논픽션 작가 이범준씨는 저서 ‘일본제국 VS 자이니치’에 "일본의 태도를 그대로 따라 한 곳이 한국"이라고 밝혔다.

"한국은 식민지를 통과하면서 일본이 만든 내셔널리즘을 학습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헌법의 주어가 ‘인민(People)’이지만, 한국은 일본과 똑같이 ‘국민’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초안은 모두 ‘인민’이었다. ‘국민’으로 바꾸어 인권의 조건으로 국적을 요구했다."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라는 공동체는 강력하게 작동하나 테두리는 불명확하다. 정치적 목적으로 교육된 가상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르고, 작동 방식을 내셔널리즘이라고 한다. 일본과 조선에서는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며 대립적이고 배타적으로 형성됐다. 서로를 적대시하며 강화했고, 자이니치는 그 경계에서 고립됐다. 그 수는 100만 명에 달한다. 일본 전체 인구의 약 1%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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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해줄 나라가 없는 사람,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난민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서류(종이)가 발행되지 않아 ‘상파피에(Sans Papier)’라고 부른다. 국민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이니치는 사막으로 내몰려 텐트에서 지내는 난민은 아니지만, 국가의 보호라는 약속에서 방출됐다는 의미에서 난민이다. 느닷없이 국적을 잃고 그에 따라 다양한 권리도 상실했다. 온갖 차별과 학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모자수가 파친고 사업에 뛰어든 배경이다. 이민진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에서 선자의 손자 솔로몬(진하)은 일본인 상사 가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 사실 너도 고용해 줄지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는 아직도 조선인들을 교사,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잖아. 넌 돈을 많이 버는 데도 도쿄에 방을 빌릴 수도 없고. 빌어먹을 1989년!"


일본의 버블 경제는 1989년 최고조에 달했다. 그해 12월 29일 평균 주가는 역사상 최고치인 3만8915엔이었다. 도쿄의 경우 국제화에 따른 상업지 부흥으로 택지 등 지가도 크게 올랐다. 금융완화 정책까지 더해지자 금융기관들은 대출 문턱을 낮춰가며 치열하게 경쟁했다. 주 거래처를 많이 가지고 있던 구 재벌계 은행들은 유리한 입장이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금융기관들은 경영이 어려워졌다. 한계에 놓이자 다양한 돌파구를 모색했고 때마침 찾아온 버블과 금융완화 정책을 천재일우의 호재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심화한 대출 경쟁과 총통화 증가는 더 많은 거품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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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시플리은행에서 일하던 솔로몬은 거대한 흐름에 편승해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려 한다. 여의치 않은 호텔사업을 성공시키면 부사장이 되는 조건으로 도쿄를 찾는다. 승진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자신을 얽매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파친코’는 그런 그가 과거와 소통하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 주안점을 둔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솔로몬은 피아노 앞에 앉아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배운 뱃노래를 무의식적으로 연주한다. 과거 선자를 아끼던 하숙집 남자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며 불렀던 노래다. 솔로몬은 그 배경을 알지 못한다. 그저 자이니치로 태어나 차별과 멸시를 당한 기억만 떠올린다.


‘파친코’는 이 배경을 쇼와 천황이 사망한 시기로 설정했다. 직후 일본에선 전후가 완전히 종식됐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전후라는 개념은 1945년 이후를 지칭하는 시간적 의미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전전(戰前)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한 일종의 가치 공간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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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캐롤 글럭이 ‘긴 전후’라고 표현했듯이 일본 사회는 오랫동안 패전과 냉전 질서가 만들어낸 조건 속에 놓여 있었다. 특수한 가치 공간에서 자이니치는 물리적 재건은 물론 차별, 억압 등과 싸우며 새로운 정체성을 정립해갔다. 그 과정은 성공이나 회복이라는 단선적 내러티브로 서술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파친코’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포착하고 끌어안으며 새로운 정신의 좌표를 제시한다. 선자와 솔로몬의 이해와 화합으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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