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문화·예술의 자유와 차별금지는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돼 있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 제11조는 문화 분야의 차별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제22조에 담긴 ‘모든 국민은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조항과 함께 국민 기본권을 상징하는 내용이다.

헌법적 권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문화·예술 분야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 어떤 분야보다 상상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지만 권력의 입김에 취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선진국 분류 기준 가운데 국가 경제력 못지않게 문화 역량을 중시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자유의 가치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는 문화 정책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2018년 4월 4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영화계 대국민 사과와 혁신 다짐 기자회견'에서 영화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2018년 4월 4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영화계 대국민 사과와 혁신 다짐 기자회견'에서 영화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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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선진국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중시하는 가치는 이른바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다. 문화 정책에 있어 공공이 지원은 하지만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자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취지가 녹아 있다.

1945년 영국의 예술평의회(Arts Council) 창설이 팔 길이 원칙의 기원이다. 영국 정부는 재정 지원은 하지만 영화 제작 과정에 간섭하지 않고 자율성을 줬는데 이 정책이 주요 국가로 번지면서 문화·예술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 원칙으로 확립됐다.


주요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팔 길이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1998년 2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역대 정부가 적어도 겉으로는 이 원칙을 존중하는 모습을 취했다.


문제는 문화·예술 분야의 경우 권력의 ‘이미지 정치’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가치가 위협받기 쉽다는 점이다. 실제로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체제 선전과 홍보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여러 국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체제 이념 홍보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문화·예술인은 응징하거나 지원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길들인다.


이와 관련해 우리도 흑역사를 갖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10월에 터진 ‘블랙리스트’ 사건은 문화·예술계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블랙리스트 1만명설(說)이 구체적인 명단과 함께 폭로됐다. 정부가 예술 지원에 있어 ‘정치 검열’을 시도했다는 내용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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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들은 군사독재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났다는 점에 개탄을 감추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예술인 권리 보장법’ 제정 등 재발 방지 노력이 이어졌지만 블랙리스트 충격파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는 권력 교체기는 문화·예술인들이 가장 긴장하는 시기다. 이념 과잉의 시대를 살아온 대한민국 현실에서 괜한 우려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대선에서 특정 후보 지지 선언을 한 문화·예술인들이 밥벌이를 걱정해야 한다면 이를 정상으로 볼 수 있을까. 의혹의 시선을 불식시키는 것은 이제 새 정부의 몫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에서 밝힌 것처럼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자기검열 독버섯’이 얼씬도 못하도록 문화 생태계를 보호한다면 K-컬처는 새 정부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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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강국의 위상을 세계에 뿌리내린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된다면 그 자체로 성공한 정부라 평가할 만하다. 이를 실현하려면 단 아홉 글자만 기억하면 된다. ‘상상의 자유를 허하라.’


류정민 문화스포츠부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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