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를 지나며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배운 말이 하나 있다. 존버. 어느 영화배우의 이름이 아니다. '존나게 버티다'라는 말의 준말이라고 한다. 이 말로 글 제목을 삼은 학생이 주저하듯 글을 발표했을 때 나는 글에 비속어를 쓰면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방송에서는 '존엄하게' 혹은 '존중하며'라고 순화되어 쓰인다는데, 버티는 일의 절실함이 학생의 말에서 절절하게 살아나기에 고개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당부했다. 선생님도 같이 버티고 있다고,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혼자라고 생각되면 언제든 선생님을 호출하라고. 이 시절에는 누구든 들어줄 귀가 되는 것도 중요한 책무이지 싶어서.
다들 버티느라 애쓴 한 해다. 저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안간힘을 쓰셨을 것이다. 고립과 단절과 불안이 일상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돌아본다. 잃어버린 것은 물리적인 접촉만이 아니다. 안정과 믿음, 전망과 계획도 잃어버렸다. 마스크 없이 서로 손을 잡고 마주하던 시절을 누구나 그리워하고 옛 사진을 보면 이런 날이 있기나 했는지 아득하다. 시절이 좋아지면 만나자는 약속을 되풀이하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지난날, 왕래와 대면이 자유로웠던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물어보면 답은 쉽지 않다. 건강한 사람이 일터에서 떨어지고 부서져 죽는 일. 서로 같은 인간이 피부색, 성, 성적 취향, 정치적 견해, 종교가 다르다고 차별 받는 일. 권력이 정의와 법을 내세워 개인을 단죄하고 자의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일. 이게 다 그 자유롭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일이다. 정치가들은 선거 전에는 모든 것을 다 바꿀 듯 큰소리지만, 막상 가능한 자리에 가면 경제적 이윤과 정치적인 표를 계산하며 미적댄다. 사람을 살게 하는 일은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다. 삶의 기본 윤리다. 이익을 따지는 동안 귀한 목숨들이 매일 사라진다. 그러니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목숨을 죽이는 일과 같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편리는 실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가능하다. 주문하면 총알처럼 배송되는 시스템의 안락은 총알처럼 날아다니다 과로로 심장을 움켜쥐고 죽어가는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다. 무자비한 무한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는 동안 우리는 함께 사는 공생의 윤리를 잃어버렸다. 건강하게 일하는 기쁨과 노동의 가치에 대해 희망이 없는 사회에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저마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 투자를 한다.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상대적인 박탈감, 과도한 경쟁 논리, 정상 사회의 비정상의 가치 안에서 약한 이들이 스러진다.
한 해를 보내며 떠난 이들이 생각난다. 순리대로 나이 먹어 '생로병'을 경험한 죽음이 아니라 창창한 나이에 죽은 자들이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학대 받다 죽은 아이들, 고립되어 죽어간 청년들, 집이 쉼터가 되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 학생들에게서 '존버'를 배운 나는 학기 마지막 수업에서 다시 '존버'를 당부했다. 컴퓨터 화면으로 학생들 눈빛을 일일이 마주하며 모든 어려움은 다 지나가는 법이니 포기하지 말자고, 삼시 세끼 따뜻하게 잘 챙겨 먹고 하루에 두 번 하늘 보면서 같이 늙어가자고 당부했다. 코로나 블루 이전부터 드리웠던 그늘이 더 짙어지는 어려운 시절. 나의 기원은 우리 젊은이들이 부모세대의 욕망을 멍에처럼 지고 시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죽지 말고 버티자는 간곡한 청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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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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