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에너지는 식량의 다른 이름
AD
원본보기 아이콘


어떤 학자들은 그 전부터라고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심각한 연료 부족을 겪었다. 당시까지 연료는 주로 목재였다. 나무는 땔감뿐만 아니라 건축, 선박 건조 재료 등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제철산업에서도 다량의 목재를 연료로 사용했다. 도시화마저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6, 17세기 영국에서는 농업 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됐다. 소위 인클로저가 진행되면서 농업혁명이 발아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인구 또한 빠르게 증가했다. 16세기 중반부터 한 세기 동안 영국의 인구는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같은 기간 런던의 인구는 5만명에서 35만명으로 증가했으며, 두 세기 이후 1850년에는 250만명이었다.

나무의 생산주기가 이와 같은 인구의 증가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남벌이 이뤄지고 위기가 초래됐다. 기실 영국이 스칸디나비아에서 목재를 수입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전반이었다. 17세기만큼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산림의 황폐화가 그만큼 일찍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목재의 대안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영국에는 석탄이 다량 부존되어 있었다. 물론 석탄은 훨씬 이전부터 연료로 사용됐다. 그러나 연기와 불쾌한 냄새 그리고 생명을 앗아가는 유독가스까지 목재 및 숯과 비교해 연료로서 열등한 재료였다. 석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석탄을 생산하고 가공하는 기술도 빠르게 발전했다. 높은 비용이 문제였지만 석탄에 열을 가해 불순물과 유독가스 등을 제거하는 기술은 이미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개발됐다.

석탄 생산은 비용이 체증하는 대표적인 경우다. 처음 지표 또는 지표에서 가까운 지하에서 생산이 이뤄지다가 점점 깊은 곳으로 굴착해 들어간다. 깊게 갱도를 팔수록 비용은 더 많이 든다. 그리고 깊은 갱도에는 물이 고이므로 물을 퍼내지 않고는 작업하기가 어렵다. 물론 사람과 동물의 힘을 이용해 물을 퍼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시 석탄산업의 최우선 과제였다. 17세기 말까지 영국의 특허 가운데 75%가 석탄 생산과 관련된 것이었고 발명 가운데 15%가 탄광의 배수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하나가 영국의 발명가 토머스 세이버리(Thomas Saveryㆍ1650~1715)의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은 여러 단계를 거쳐 개선된 다음 제임스 와트(James Wattㆍ1736~1819)에 의해 효율성이 크게 제고됐다.


증기기관의 발전으로 1560년 22만7000t이던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1700년 256만t, 1800년 1500만t으로 증가했다. 1800년 영국의 석탄 생산은 나머지 유럽 국가 전체 생산량의 다섯 배였다. 생산한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증기기관을 운용하는 비용도 쌌다. 그리고 증기기관은 제철, 섬유, 철도 등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는 경제가 연료, 곧 에너지의 조화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에너지에서 선악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현대 경제에서 에너지는 식량과 같은 것이다. 이용하기 나름이지, 석탄과 원자력은 더럽고 풍력과 태양광은 깨끗하다는 이분법은 고루하다. 태양광이 황폐화한 산림의 사진을 보라. 그렇게 생산한 에너지가 깨끗하다? 더군다나 에너지를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무지하고 어리석다고밖에 달리 말하기 어렵다. 에너지 정책을 성찰하지 않고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나라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AD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장세희 기자 jangsay@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