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이었다. 그 이전인 1770년대까지 프랑스는 상업과 산업에서 영국에 뒤지지 않는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2500만명 정도로 서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영국 인구가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포함해 900만명 정도였으니 세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인구가 많으니 그만큼 큰 잠재적 시장이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는 지금과 같이 하나로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다. 봉건제도의 잔재가 다수 남아 있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제한된 영역 이외에 지역마다 공국과 가톨릭 주교의 자치령 등 중앙정부의 권력이 제대로 행사될 수 없는 지역이 비일비재했다. 짧지 않은 기간 프랑스의 서쪽 대서양 연안은 영국 왕실의 봉토였다. 백년전쟁(1337~1453)은 영국과의 프랑스 왕위 계승 다툼이었지만 봉토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나라가 이토록 갈라져 있으니 지방마다 서로 다른 세금과 관세(통과세)가 존재했다. 시장의 잠재력을 구현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한 나라 안에서 마치 외국을 대하듯 다른 지방과의 거래에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재상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ㆍ1619~1683)가 나서 적어도 파리 주변 지역만이라도 자유무역을 이뤄보려 시도했지만 부분적 성공뿐이었다.
이와 같은 봉건적인 분열을 휩쓸어버린 것이 혁명이었다. 혁명정부는 파리와 지방의 모든 지역을 관장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국내 모든 지역에서의 내부 관세를 폐지함으로써 자유무역을 보장했다. 관세는 외국과의 무역에만 부과되었다. 국가가 비로소 국가 차원의 정책을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국가에 유익한 혁신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혁명의 격동이 가라앉은 이후 100년이 조금 더 지난 1910년 프랑스의 인구는 3900만명이었으나 영국의 인구는 4090만명이었다. 그 사이 영국의 인구는 4배(300%) 이상 증가했으나 프랑스의 인구는 단지 50% 증가했다. 한편 1900년 영국의 농업인구는 7%였으나 프랑스에서는 43%였다. 또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농업소득의 비중은 영국에선 5%였으나 프랑스에서는 35%였다. 같은 해 10만명 이상의 도시 수가 영국에서는 50개였으나 프랑스에서는 15개뿐이었다.
20세기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 산업혁명이 영국에 비해 왜 더디게 전개된 것일까? 이에 관한 학설은 다양하다. 그러나 몇 가지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먼저 전쟁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전개된 무분별한 나폴레옹전쟁과 패배는 인력과 영토 그리고 국고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1870년 일어난 보불전쟁 패배의 후과 또한 있었다.
다음으로 혁명 이후 도입된 여러 제도 가운데에는 자본 축적을 저해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국민은 정부의 조세 정책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과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조세 회피가 만연하고 재정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노출된 경제활동에 대한 세율을 점점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국에서와 달리 소농의 재산권을 특별히 지나치게 보장함으로써 토지의 합병과 농업 부문의 생산성 향상을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전개되는 상황은 프랑스혁명 이후에 전개된 조치들의 불길한 후과를 암시하고 있다. 마치 전쟁을 하듯 국고를 탕진하고 조세를 부과하고 있다. 조화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갈라치기 해서 투자를 위축시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백년 앞을 보라고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전염병 이후라도 볼 수는 없는 것인지 묻고 싶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의 역사를 결정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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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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