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재난지원금의 반전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신용·체크카드 충전 신청이 11일 오전 7시 9개 카드사 홈페이지를 통해 시작됐다. 공적 마스크 5부제와 마찬가지로 신청에는 요일제가 적용되고 16일부터는 언제든 신청할 수 있게 바뀐다. 지원금은 1인 가구 40만원, 2인 가구 60만원, 3인 가구 80만원, 4인 이상 가구 100만원이다. 사진은 이날 서울 종로구의 주민센터를 찾은 한 시민이 지원금 안내문을 바라보는 모습./김현민 기자 kimhyun81@
[아시아경제 이초희 금융부장]가이 리치라는 다소 독특한 이름의 영국 영화감독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대작은 없지만 특유의 스토리텔링과 연출로 인해 '영국의 타란티노'라 불리며 제법 많은 골수팬을 거느리고 있다. 1998년 '록 스탁 투 스모킹 배럴즈'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2년 뒤, 할리우드 자본을 등에 업고 톱스타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스내치'를 성공시키며 세계 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가이 리치의 영화는 독특하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이리저리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고 일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러닝 타임 내내 등장인물들은 비속어가 뒤섞인 대사를 속사포같이 쏟아낸다. 편집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고 현란하다. 스토리까지 복잡하다 보니, 보는 내내 혼이 쏙 빠진다. 결말은 앞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이 무색할 만큼 생뚱맞은 인물이 '어부지리'로 모든 것을 차지하며 끝난다. 90분 내내 관객을 가지고 놀다 뒤통수를 제대로 친달까. 이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며 한 번 빠지면 서둘러 다음 연출작을 찾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영화에서도 자주 만나기 힘든 독특한 스토리와 연출이 가이 리치의 시그니처 스타일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의 사건도 이에 못지 않다. 지난달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총선)를 앞두고 '재난지원금'이 뜨거운 감자가 됐다. 현실성 없어보이던 이 정책은 총선을 지나면서 갑자기 전 국민 100% 지급으로 공론화되더니 한 달 여만에 지급을 코 앞에 두는 상황이 됐다. 국민들은 4인 가구 기준 100만원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공돈'을 받게 된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이 벌어진다. 바로 '자발적 기부'다. 지원금 지급을 목전에 두고 정부와 정치권이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은 알아서 재난지원금을 기부하라'며 바람을 불어 넣고 있어서다. 정부와 정치권의 풀무질에 관치에 길든 금융권은 앞다퉈 릴레이 기부 선언에 동참하는 모양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가 11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 회의 시작에 앞서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부하기로 서명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원본보기 아이콘이미 대형 금융사 몇 군데가 직원 수 천 명이 '동참'하는 기부를 약속해 버렸다. 해당 금융사 직원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기부 천사'가 돼 있었다. 윤종인 행정안전부 차관은 지난 10일 브리핑에서 "긴급 재난지원금은 소비 진작과 지역경제 활성화, 골목상권 살리기 등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어차피 거저 생긴 돈인데 기부해서 좋은 일에만 쓰인다면 괜찮은 일이겠지만 또 한 번 반전이 나온다.
재난지원금은 받지 않으면 자동 기부된다. 기부된 돈이 골목상권이나 지역경제와는 상관없는 고용보험기금에 편입되는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설명해 놓은 고용보험기금은 고용안정ㆍ직업능력개발사업, 실업급여 등 고용보험사업의 재원 충당을 위해 쓰이는 돈이다. 이 기금은 원래 근로자들이 차곡차곡 내는 돈을 정부가 잘 관리ㆍ운용해 돈을 낸 근로자들의 고용안정에 쓰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지난해 거둬들인 것보다 쓴 돈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대략 2조원이 넘는 재정이 펑크가 났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당장 재원을 메워야 하는 상태다. 이 타이밍에 시의적절하게 재난지원금이라는 구원군이 등장한 것.
소비 진작과 골목상권을 살리자며 만든 재난지원금의 일부가 기부라는 과정을 거치며, 정부가 구멍 낸 곳간을 메우는데 쓰이게 된 셈이다. 이만하면 가이 리치도 무릎을 '탁' 치고 갈만한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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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부터 재난지원금 신청 접수가 시작된다. 두당 수 십 만원의 지원금은 몇몇에겐 든든한 쌈짓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발이 아닌 자발'로 가족들의 몫까지 고스란히 고용보험기금에 기부(?)해야 하는 공무원들이나 일부 금융사 직원들은 씁쓸했을 것이다. 아무리 공돈이라도 기부는 자발적일 때, 필요한 곳에 쓰여질 때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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