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탈피/박판식
노인은 누워 있다 가족은 울거나 미쳤거나 쿵쾅쿵쾅 뛰어다니고 있다
노인의 골격은 다소 움츠러들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가 빠져나갔다
내 방은 병풍 뒤의 노인과 같은 방향이다
그렇다고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과거를
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것을 보고 있다
누가 먼저 탈피할 것인가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스물아홉이 넘었는데도 머리카락과 손톱이 삐죽삐죽 자라고
노인은 노쇠한 육체를 버렸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백치가 되어 버린, 막 고아가 된 그의 사십 된 아들이
나비를 좇아 옥상의 화분 사이를 쿵쾅쿵쾅 날아다니고 있다
모두 각자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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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뚱한 일이긴 한데 이맘때면 이 시가 생각나곤 한다. ‘나비’ 때문이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이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다 보면 이 시의 마지막 세 행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오늘도 낮에 나비를 보았다. 그리고 또 별생각 없이 이 시를 찾아 읽었다. 그런데 그러고는 다시 난감해졌다. 도무지 요령부득이어서다. 이 시를 처음 읽은 게 십수 년은 된 듯한데 그 문장들은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도 어느새 풀밭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나비만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실은 꽤나 명징하다. 그런데도 읽을 때마다 우두망찰해지곤 한다. 왜일까? 모르겠다. 다만 “노쇠한 육체를 버”린다 한들 “머리카락과 손톱”은 매일매일 “삐죽삐죽 자”랄 것이고 ‘백치’도 아니면서 “나비를 좇아” “쿵쾅쿵쾅” 뛰어다니고 있는 나도 언젠간 고아가 될 것이다. 삶이란 그냥 그런 것이다. 이 비애를 사랑할 수 있을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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