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 당한 이민자 가장과 두 아들 이야기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가족 사이에도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 어색함 때문에 가족이라는 틀을 깨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인 내가, 아들에게는 아버지인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극 '듀랑고'는 매일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어색하고 불편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버지 부승과 큰아들 아이삭은 잔소리와 참다참다 '욱'하고 튀어나오는 말대꾸가 일상인 관계다. 작은아들 지미는 껄끄러운 둘 사이를 오가며 어떻게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려는 윤활유 같은 존재다. 삼부자가 사는 곳은 미국 애리조나주.

극은 부승이 정리해고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부승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회사의 경비원에게 두 아들을 자랑하며 심란한 마음을 달랜다. 큰아들 아이삭은 의대에 진학할 것이고, 작은아들 지미는 수영 챔피언이기 때문에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것이라며…. 하지만 부승에게 집에서 기타를 치는 아이삭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리해고를 당해 회사에 있던 짐을 가지고 집에 돌아온 저녁, 심란한 부승은 두 아들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목적지는 콜로라도주의 듀랑고. 아이삭은 어색하게 무슨 여행이냐며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동생 지미의 끈질긴 설득에 함께 하기로 한다.

다음날 새벽 자동차 안에 앉은 삼부자. 부승이 운전석, 아이삭이 조수석에 앉은 모습이 그래도 가족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거리. 이왕 함께 하는 여행,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인만큼 다정하게 대화도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부승과 아이삭에게 통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둘의 대화는 곧 잔소리와 말대꾸로 흐른다.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부승은 조국인 한국의 역사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두 아들은 가 본 적도 없는 곳. 정작 부승 자신도 20년 넘게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리뷰] 정갈한 사찰음식의 느낌, 연극 '듀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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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로드무비처럼 삼부자가 듀량고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서로 대화하면서 각자가 지내온 삶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가족이지만 차마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각자의 비밀들도 하나씩 드러난다. 삼부자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등진, 아내와 엄마에 대한 기억도 떠올린다.


이들이 결국 가족으로 묶일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엄마와 아내의 부재 때문으로 보인다. 엄마와 아내의 부재는 부승과 두 아들에게 힘겨운 상황이지만, 그렇기에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좀더 따뜻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까.


그래서 가장의 정리해고와 같은 소재는 얼마든지 자극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지만 듀랑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들들이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의미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선택을 해 순간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부승은 '에이!' 하며 짧은 불만을 토해낸 뒤 속으로 집어삼킨다.


그래서 듀랑고는 사찰음식 같은 연극이라는 느낌을 주는 연극이다. 제작진은 '소소하며 평범한 가족-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비밀'라고 연극 듀랑고를 소개했다.


연극은 삼부자가 여행의 목적지로 정한 듀랑고가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삼부자가 무엇을 위해 듀랑고로 갔는지 의미마저 희석시키며 극은 끝난다. 중요한 것은 듀랑고가 아니라 여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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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볍지 않은 평범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다루기에, 담백하지만 묵직한 힘이 있다. 70분쯤 지났으려나 생각하는 순간 연극이 끝난다. 연극의 공연시간은 100분이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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