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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tage] '가운데 삶' 살라던 아버지, 굴곡진 현대사 중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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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만에 돌아온 '알리바이 연대기'…김재엽 연출 가족의 실제 삶 통해 현대사 조망
'일제·박정희 시대' 아버지와 '전두환·민주화 시대' 두 아들 "개인의 삶이 곧 역사"

'알리바이 연대기' 공연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알리바이 연대기' 공연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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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1987년 12월16일. 아버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기호 2번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의아했다. 뉴스를 볼 때마다 기호 1번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30%대 예상 득표율로 1위였고 김영삼 후보는 30%를 넘지 못했다. 아버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633만7581표를 얻는 데 그쳤고 노태우 후보가 828만2738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득표율은 36.6%와 28.0%였다.


대통령 선거 며칠 전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 녀석이 말했다. "우리 아빠가 김대중은 절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북한 김일성이 탱크 몰고 내려와 남한이 북한처럼 된다고 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를 보고 떠오른 나만의 간략한 연대기다. 그 시절 나와 내 아버지의 연대기, 그리고 내 또래 친구들과 친구들 아버지의 연대기.


'알리바이 연대기'는 아버지 김태용씨와 그의 두 아들 김재진, 김재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극중 인물 김재엽은 알리바이 연대기의 연출 본인이다. 김 연출은 자신의 아버지와 형 그리고 본인이 실제 겪은 일들로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조망한다. 본인의 지극히 개인적 삶에 근거한 연극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촘촘히 엮으면서 한 개인의 삶이 곧 역사임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나라 잃은 슬픔에서 출발한 한국 현대사는 때로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힘없는 개인은 침묵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는 알리바이를 꽤 필요로 했다.

1막은 아버지의 연대기다. 아버지가 1930년 일본국 대판(오사카)시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까지 다룬다. 2막은 김재진, 김재엽 형제의 연대기로 1980년부터 2019년까지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1946년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가나오카 마사오'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을 제패한 1936년 소학교에 입학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는 학교에서 날마다 대포를 닦았다.

'알리바이 연대기' 공연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알리바이 연대기' 공연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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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한국으로 들어와 정착한 곳은 김 연출 할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선산군 구미면이다. 구미면은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박정희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6·25 발발 후 아버지는 육군종합학교에서 소위로 임관했고 교육받으러 간 광주 포병학교에서 박정희를 두 번째로 만났다.


아버지는 1960년 장면 정부하에서 공채 국가공무원이 돼 국토건설사업에 참여했다. 당시 '사상계' 편집위원들이 국토건설사업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연수받으면서 장준하 선생을 만났다. 1961년 5ㆍ16이 일어나면서 아버지의 짧은 공무원 생활은 막을 내린다.


아버지는 박정희가 부정선거로 김대중 신민당 후보를 따돌린 1971년 대통령 선거의 기억에 대해 이렇게 떠올린다. "박정희가 유세를 하면서 '이번에 한 번만 표를 주시면 더 이상 여러분들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눈물로 호소를 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세 번째로 대통령이 되더니만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키더라고. 표를 달라고 할 필요가 없게 아예 선거를 없애버렸으니까."


아버지는 1975년 자주 들르던 헌책방의 라디오에서 인민혁명당 사건과 장준하 선생의 사고 소식을 접한다. 시국은 극도로 불안했다. 아버지는 형에게 말한다. "우리나라 같이 불안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쪽에 서야 한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운데 서는 거야. 앞에 나서지도, 뒤에 처지지도 말고 딱 중간에 서는 거지. 그래야 너와 네 가족을 더 잘 지킬 수 있는 거란다." 1979년 10ㆍ26을 끝으로 1막은 막을 내린다.


2막에서 대학생이 된 형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전두환 정권을 욕하다 경찰서로 끌려간다. 김 연출은 고등학교 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한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목격하고, 대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서는 얼떨결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대구에 있는 아버지는 두 아들이 서울에서 혹여 정권 반대 시위에 가담할까 노심초사한다.


김재엽 연출 [사진= 국립극단 제공]

김재엽 연출 [사진=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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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 연대기는 김 연출의 의도대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띤다.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김 연출은 "아버지의 일기 등 집안에 가족들이 남긴 기록이나 자료들을 많이 찾고 어머니와 형님을 오랜 시간 인터뷰했다"며 "대본을 완성한 뒤 감수도 받았다"고 들려줬다.


알리바이 연대기는 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13년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희곡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극은 무거운 현대사를 다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대학생 형이 경찰서로 끌려가 집안에 난리가 난 다음 날 김 연출은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보기 위해 혼자 대구시민운동장으로 향한다. 원래 형과 함께 보러 가기로 약속이 돼있는 경기였다. 이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철없는 김 연출과 형의 모습을 극 중간중간에 삽입해 객석의 웃음을 유발한다.


연극은 아버지와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무대를 빙빙 도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버지와 아들은 꼬리잡기하듯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일정하게 간격을 유지한 채 꽤 오랫동안 자전거를 굴린다. 역사는 그렇게 무수히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편으로 어쨌든 느리지만 바퀴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고, 그리고 그 바퀴를 굴리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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