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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자의 농구 이야기 3] ‘막내 코치’ 김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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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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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강자 객원기자] 한국프로농구(KBL) 원주DB의 원 클럽맨(One Club Man) 김주성(39)이 코치로 돌아왔다. 2017-2018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어학과 농구를 공부하며 지도자 연수를 하다가 이상범 감독의 제안을 받고 코치로 합류했다. 신임 김주성 코치를 지난 7월 16일 홈구장에서 열린 경희대학교와의 연습경기 때 구단 숙소에서 인터뷰했다.


2002-2003시즌에 원주TG에서 프로 데뷔한 김주성은 첫 시즌부터 당시 플레잉 코치였던 허재와 함께 팀을 챔피언 결정전 우승으로 이끌었고, 정규리그 우승 5회, 챔피언 결정전 우승 3회를 차지했으며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 MVP 각각 2회 수상했다. 2017-2018시즌에는 팀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끈 뒤 코트를 떠났다. 그는 통산 1만124득점을 올렸고, 리바운드 4366개, 그리고 블록 슛 1028개를 기록한 레전드다.

■농구와의 만남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대표로 육상 대회에 두 번 정도 나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때 키가 168㎝였다. 1990년대 농구 전성기 때 중학생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농구를 즐기다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전문적으로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늦게 시작하게 된 농구와의 만남과 인연에 대해 물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 168㎝. 지금은 안 그런데 그 당시에 지방에서는 큰 편이었어요. 중학교 때 특히 많이 컸어요. 제가 중학교 때 농구가 워낙 인기가 많았고 친구들이랑 농구를 하다가 고등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싶어서 알아보았죠. 중학교 3학년 말에 담임 선생님이 체육선생님이셨는데 근처에 있는 학교에 테스트 한 번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서 본 게 계기였어요”라고 했다. 테스트를 받고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농구를 시작한 그는 가정 형편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부분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운동 시작할 때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근육이 붙어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근육을 만드는 데 한 1년 정도 걸렸죠. 그래도 힘들게 운동을 시작한 과정들이 있다 보니까 포기란 것은 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가족적인 관계도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두 분 다 장애를 가지고 계시고 생활이 어려운 상태에서 제가 하던 것을 포기하고 바꾸기에는 힘든 환경이었으니 한 번 선택을 했으면 거기에 충실하고 끝까지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정봉섭 선생을 만나 중앙대학교로 진학했다. 그의 잠재력이 폭발한 '무적 중대 시절'의 이야기다.


“중앙대가 좋은 게 1학년 때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운동만 하고, 2학년이 빨래 같은 것을 하고, 3학년 때 아무 것도 안 하고 운동에 집중하고, 4학년이 바닥 미는 시스템이었어요. 1학년이 갓 들어와 가지고 적응을 못하기 때문에 적응을 시켜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이 대학교 들어와 향수병 같은 것도 있었기는 했는데 그나마 대학 생활 적응을 잘했습니다.”


“대학교 동기에는 고등학교 때 같이 뛰었던 친구 박지현도 있고 한 살 위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잘 알던 (송)영진이 형이 있어서 생활은 재미 있게 지냈어요. 그리고 정봉섭 감독님이 중앙대에서 정통 센터들을 잘 키우셨던 분이시라 여러 가지 많이 배웠고 성장하면서 확실히 3학년 때 늘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3학년 때 4학년 형들과 친해서 심적으로 편해서 농구가 재미있게 잘 되었던 것 같아요”


“어떤 한 가지를 배우면 경기 때 해보면 통하는 느낌이랄까, 많이 보고 많이 해보려고 노력했던 게 좋았고, 그리고 당시 야간 훈련 때 자율 훈련을 매우 많이 했어요. 학년에 상관없이 선후배가 2대2, 3대3, 그리고 우리끼리 5대5 게임도 하고 그랬어요. 1대1은 포지션도 섞어서 해보기도 했어요.”


■원 클럽맨 김주성의 16시즌

200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으로 원주TG에 입단한 그는 원주DB로 구단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도 16시즌 동안 한 팀에서 뛰었다. 그는 16년을 '막내 시절, 주축 선수 시절, 그리고 은퇴를 앞둔 시절'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 시즌1, 막내 김주성

“처음 신인 막내 시절에는 그냥 감독님과 선배들만 따라갔어요.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고 그렇게만 했었어요. 그러니까 잘 되었었고요. 분명히 그 때에도 힘들기도 했었어요. 외국인 선수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항상 제가 맡는 외국인 선수들한테 평균 20점, 30점 줬으니까, 그런데 한 선배가 ‘네가 막아도 30점, 외국인 선수끼리 막아도 30점이니까 너무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고 이야기해주셔서 많은 힘을 얻었어요. 그래서 좀 더 마음 편하게 수비를 하게 되었고 제가 잘 모를 때 계속 물어보면서 막았어요. 정말 선배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 때, 허재 플레잉 코치님이 코트 안에서는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워낙 패스를 잘하시니 가끔 예상하지도 못할 때 공이 와서 못 잡으면, ‘왜, 못 잡냐! 집중해서 잡아야지!’ 혼도 많이 났었어요. "


“그리고 항상 냉장고에 한약이 있었는데, ‘야, 너도 먹어!’하면서 건강 많이 챙겨주셨어요.”


▶ 시즌2, 주축으로 팀을 이끌었던 김주성

“주축이 되면서 선배들 따라 후배들을 이끌어 나가는 시기가 시작되었죠. 그게 몇 년 차가 안 되었어요. 3년차 아니면 4년차 때부터였어요. 그 때 이것저것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코트에서 열심히 하면 뭐든지 되지 않겠냐 하면서 계속 지내왔던 것 같아요.”


“제가 이때까지 16년 동안은 팀이 융화가 잘 되고 선후배가 서로 위할 줄 알고 걱정도 많이 해주는 그런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몸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시합도 열심히 뛰고 이기는데 많이 집중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10년을 지냈죠”


“경기에 대해서도 조금씩 늘었죠. 제가 잘했다기 보다는 팀에 맞게 감독님의 전술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면서 그렇게 긴 시즌을 보냈던 것 같아요.”


▶시즌3, 은퇴를 앞둔 김주성

“은퇴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감사하게도 이상범 감독님께서 리빌딩하는데 마지막 1년 더 하면 어떻겠냐고 해주셨어요. 1년을 더 들어와서 하게 되었는데 운이 좋아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솔직히 리빌딩 시즌이었기 때문에 어린 친구들이 주로 경기를 뛰고 하니 꼴찌를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1등을 하고 시즌이 정말 재밌게 흘러가니까 저 또한 재미있었고 드라마틱한 시간이었어요.”


“디온테 버튼이라는 좋은 외국인 선수와 (윤)호영이, 서민수, 저를 포함해서 선수들을 감독님께서 잘 융화시켜주셔서 시너지를 내면서 드라마를 한번 썼죠. 그 드라마의 한 페이지에 제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 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시즌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그런 시즌이 아니었다면 조용히 은퇴하려고 했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은퇴를 화려하게 할 수가 없어요. 허재 감독님이나 서장훈 선배님이 아닌 이상은 은퇴를 그렇게 화려하게 할 수가 없거든요. 저조차도 은퇴는 팀에서 간단하게 하고 경기 때도 그런 마음 먹고 들어갔었는데 그게 뜻하지 않게 드라마를 쓰기 시작하니까 저까지 눈에 띄게 빛을 발한 거죠. 그래서 은퇴 투어를 하게 되었고 정말로 특별한 시즌이었어요.”


■고참에서 막내 코치로 새출발

프로농구 선수로서 은퇴를 앞두고 드라마틱한 시즌을 마친 그는 팀에 막내 코치로 합류하게 됐다. 현역 선수 생활 마지막을 함께 지냈던 이효상 코치와 김성철 코치, 그리고 원주DB에서 10년지기 동료 후배로 지낸 윤호영에게 이야기를 들어봤다.


원주DB 프로미 김주성 코치, 이효상 코치(가운데), 김성철 코치(오른쪽).

원주DB 프로미 김주성 코치, 이효상 코치(가운데), 김성철 코치(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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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상 코치가 본 김주성

"팀에 합류한 지가 한 달 반 정도 지났는데 선수로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니까 코치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인도 잘 알 거에요. 워낙 성실하다 보니 배우려고 잠을 아끼면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 해낼 것 같아요."


▶ 김성철 코치가 본 김주성

"레전드 길을 걸었던 선수였고 자기 관리도 잘하니까 선수 때의 김주성의 노하우를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면 될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코치라는 것은) 사회생활 시작인 것 같은데 본인이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워낙 겸손한 면도 있고 스마트하기 때문에 잘할 거라고 믿고 기대하고 있어요."


▶윤호영이 본 김주성

"일단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였고, 제가 본받을 점이 많은 형이었어요. 생활에서 전체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점이나… 코트 안에 들어갔을 때 소통하려고 하고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보완해 나가는 것을 유난히 강조했었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형이었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냥 잠깐 휴가 얻어서 여행 갔다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온 느낌이에요. '코치' 소리가 잘 안 나서 ‘형’이라고 부르는 습관 빼고는 딱히 어색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2014년 인천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결승전에서 이란을 79-77로 꺾으며 금메달 확정 후 환호하고 있는 한국남자농구대표팀.

2014년 인천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결승전에서 이란을 79-77로 꺾으며 금메달 확정 후 환호하고 있는 한국남자농구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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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이 생각하는 국가대표

김주성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청소년대표로 선발되어 국제대회라는 소중한 경험도 해봤고 성인 대표선수로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은메달, 그리고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다.


“2002년에는 23살, 2014년에는 35살이었는데 그 때가 제일 영광스러운 자리였죠. 대표팀 생활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프로 16년에 거의 20년 가까이 지냈던 것 같아요. 거의 프로 팀처럼 내 팀이나 마찬가지죠. 소집되면 훈련을 했었고 훈련할 때마다 정말 잘하는 선수들이 모이니까 대표팀 생활에서도 재미있게 지냈었어요. 농구를 하기가 아주 편하고 여러 감독님을 만났으니 다양한 것들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표 팀에서의 금메달은 프로 우승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죠. 국가를 대표해서 나가는 자리니까 우리나라를 알리는 느낌이랄까 국가 대항전이니까 솔직히 아시아에서는 농구는 중국 다음으로 잘했었는데, 부산 아시안게임 때까지는 거의 2등이었는데 점점 밀려나고 우리나라가 5위, 6위 상태였거든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했을 때에는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아시아에서 1위를 할 수 있는 팀이라는 것을 알리게 되어서 정말 기뻤어요. 그 느낌을 우승을 하고 코트에서 뛰어다니면서 표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때 체육관에서 엄청 많이 뛰었어요.”


그는 같은 해에 2014년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스페인 대회에 출전했었다. 아쉽게도 1승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아시아권 선수들을 상대로 하는 경기와 유럽 선수들과 하는 경기는 완전히 달라요. 힘과 기량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그런 것은 계속 부딪혀봐야 내가 어떤 훈련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연구를 할 수 있는 거죠. 우리끼리 붙으면 거기서 발전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겠죠. 그 때, 스페인 월드컵은 1승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엄청 좋은 경험이었어요. 지금 중국이 미국에서 D리그 나가듯이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야 발전할 수 있죠.”


그는 이번 8월말부터 열리는 2019 FIBA월드컵 중국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당부와 함께 응원의 메시지도 보냈다.


“잘 하고 있으니 꼭 1승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목표는 예선 통과하는 마음으로 임했으면 좋겠어요. 1승도 좋지만 1승을 할 정도면 예선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사진=박강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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