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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판 '살인의 추억', 집념의 10년 수사 왜 무죄 나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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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수사 결국 무죄…이대로 '미제사건' 되나
재판부, 범행 정황 있으나 직접 증거로 볼 수 없어
유력한 용의자 박 씨 "가족과 발 뻗고 생활하고 싶다"

보육교사를 성폭행 살해한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신청된 피의자 박모(49)씨가 지난해 12월 21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끝내고 제주동부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기 전 취재진에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보육교사를 성폭행 살해한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신청된 피의자 박모(49)씨가 지난해 12월 21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끝내고 제주동부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기 전 취재진에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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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 - 제주지법 형사2부


장기미제사건인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피고인이 10년 만에 구속기소 돼 법정에 섰지만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제주판 살인의 추억'이라 불릴 정도로 피해 여성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길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관련기사|[한승곤의 사건수첩]②제주 '살인의 추억' 9년 전 무슨 일 있었나)


지난 11일 피고인 박모(50)씨에 무죄 선고를 선고한 재판부 판결 내용을 살펴보면 재판부는 수사당국이 재수사 과정에서 새롭게 찾아낸 증거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 씨는 2009년 2월1일 새벽 자신이 몰던 택시에 탄 보육교사 A(당시 27·여)씨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제주시 애월읍 농로 배수로에 유기한 혐의(강간 등 살인)로 재판에 넘겨졌다.

09년 2월1일 새벽 3~4시 그녀에게 무슨 일 있었나

당시 사건을 수사한 제주 서부경찰에 따르면 사건은 09년 2월1일 새벽 4시께 발생했다. 피해 여성 A 씨는 친구들과 삼겹살과 술을 먹은 뒤 택시를 타고 '제주 법원'에서 내렸다. 법원 주차장에는 A 씨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법원에서 내린 A 씨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술을 마셨고 너무 늦어 친구들과 찜질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말한 뒤, 택시를 타고 인근에 있는 남자친구 집으로 갔다.


당시 A 씨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로 두 사람의 관계는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이들은 이날 새벽 다퉜고, A 씨는 남자친구 집에서 나온 뒤 3시5분께 애월읍 소재 콜택시 회사에 전화해 택시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콜택시 이용객이 많아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 1시간 뒤인 새벽 4시4분께 박 씨 휴대전화는 그의 집과 가까운 애월읍의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전원이 꺼졌다.


이후 A 씨의 행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은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전경대 2개 중대와 형사과 전 직원, 119구조대, 제주방어사령부 군인, 주민 등 400여 명과 2마리의 구조견이 투입,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2009년 제주 보육교사 유류품 발견 현장.사진=연합뉴스

2009년 제주 보육교사 유류품 발견 현장.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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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A 씨…배수로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

"운동하다 배수로에 여자가 엎드린 채 숨져 있는 모습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 당시 A 씨를 발견한 60대 주민


A 씨는 일주일이 지난 8일 오후 1시50분께 애월읍 애월고 인근 고내봉 도로변 배수로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과학수사팀을 현장으로 급파에 정밀감식 등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A 씨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것으로 확인된 애월읍 광령초등학교 인근에서 15㎞ 정도 떨어진 곳으로 확인됐다.


발견 당시 A 씨의 시신은 실종 당일 입었던 무스탕 밤색 점퍼와 검은색 치마 등을 그대로 착용한 상태였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한 증거물과 유류품, 피해자 소지품 등을 모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으로 보내 정밀 감식에 들어갔다.


국과수에서는 피해자의 DNA, 시신 바로 옆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 현장 인근 폐쇄회로(CC)TV를 통해 사건 당시 통행한 차량 등을 특정했다.


경찰이 당시 조사를 벌인 택시만 5천 대가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콜택시와 일부 회사 택시를 제외하고는 택시에 운행 기록 장치를 달거나 기록을 남겨 두지 않아 경찰 수사의 어려움이 많았다.


또 용의자는 치밀했다.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 경찰은 사건 발생 두 달 후인 4월 이 사건 관련 유력한 용의자로 박모(당시 40)씨를 붙잡았다.


하지만 범행을 저질렀다고 특정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A 씨 사망 추정 시점인 2월 7~8일 사이 박 씨는 범행 장소 부근에 없었다는 것이 확인돼,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주지방법원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제주지방법원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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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사 착수, 증거확보 돌입…영장 발부까지

경찰은 2015년 일명 '태완이 법' 이후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됨에 따라 2016년 2월 장기미제사건 전담수사반을 꾸려 재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수사 과정서 피살된 A 씨의 윗옷 어깨 부분과 피부 조직에서 2∼3㎝ 크기의 작은 옷의 실오라기를 몇 점 발견했다.


경찰은 이 실오라기들을 미세증거 증폭 기술을 이용해 박 씨가 사건 당시 착용한 셔츠와 같은 종류라는 것을 입증했다.


또 박 씨에게서도 실오라기를 발견, 증폭 기술로 이 실오라기가 A 씨가 사망 당시 입었던 옷의 종류와 같은 것임을 확인했다.


사실상 직접 증거로 볼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한 수사당국은 같은 해 5월 박 씨에 대해 영장을 신청했으나 증거 부족을 이유로 기각당했다.


이후 7개월간 다시 수사에 돌입한 경찰은 박 씨의 택시 운전석과 뒷좌석, 차 바닥 등에서 추가로 A 씨가 당시 착용 옷과 유사한 다량의 실오라기를 발견했다.


또 A 씨의 가방과 치마, 휴대전화에서도 박 씨가 당시 착용한 셔츠와 유사한 실오라기를 발견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당시 CCTV 장면에 대해 추가로 보정 작업을 진행, A 씨가 탔을 것으로 보이는 영상의 택시가 박 씨의 것과 종류와 색깔이 같은 것으로 확인했다.


2009년 4월 박 씨가 경찰의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A 씨 사망 시점도 다시 수사했다.


경찰은 이른바 '동물 사체 부패실험'을 통해 A 씨가 사망할 당시 상황을 과학적으로 만들어 사망 시점을 되짚었다.


실험 결과 사망 시점이 달라졌다. 당초 A 씨 사망 시점은 2월 7~8일로 추정되었으나, 1일 새벽 3시부터 사흘 이내로 추정됐다.


앞서 경찰이 추정한 A 씨 사망 시점에 다른 장소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 풀려난 박 씨의 알라바이는 소용이 없게 됐다.


다시 증거를 확보한 경찰은 법원에 영장을 재신청했고, 법원은 지난해 12월 박 씨에 대해 영장을 발부했다.


당시 제주지법은 "사안의 중대성과 도주 우려가 있다. 영장 기각 이후 범죄혐의를 소명할 증거가 추가된 점을 고려했다"며 영장 발부 이유를 밝혔다.


제주판 '살인의 추억', 집념의 10년 수사 왜 무죄 나왔나 원본보기 아이콘



사건 발생 10년 만에 1심…증거 부족으로 '무죄'

하지만 지난 11일 재판부는 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일부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점이 있고, 통화내역을 삭제하는 등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부터 시간대를 종합하면 유력한 용의자 박 씨는 2009년 수사 당시 직접 증거가 없어 풀려났고, 2018년 5월 증거 부족으로 영장 기각, 같은 해 영장이 발부되었지만, 2019년 7월11일 결국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이다.


검찰은 앞서 지난달 13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박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해 정황은 인정 되지만, 박 씨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정적 증거는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박 씨의 택시에서 피해자의 옷에서 검출한 섬유 미세 증거물(실오라기)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같다고 판단하기 어려워 해당 증거만으로 박씨가 피해자와 접촉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택시 이동 경로가 찍힌 CCTV 증거에 대해서도 영상에 녹화된 차량이 박씨가 운전한 택시와 같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수사당국의 증거 확보 과정에 대한 위법성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영장 없이 박 씨의 거주지를 압수수색해 확보한 청바지는 압수수색절차가 위법해 증거능력이 인정될 수 없고, 청바지에서 검출한 미세섬유증거와 그 분석결과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긴급을 요하는 사정이 없었음에도 영장을 발부 받지 않은 채 거주지를 압수수색해 형사소송법 규정을 위반했다"며 "강간살인죄와 같은 중대범죄 수사를 위해 필요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위법한 압수수색은 허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A 씨 사망 시점을 2009년 2월1일께로 특정한 수사당국 수사 결과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재판부는 "재수사과정에서 이루어진 동물(돼지·개)을 이용한 실험 및 재감정 결과 사망 후 수일이 지나더라도 사체의 체온이 주변보다 높을 수 있고, 사체가 있던 지형의 특수성 때문에 발생한 이른바 기화열에 의한 냉장효과로 인하여 장기의 부패나 피부건조 등이 지연될 수 있는 점이 밝혀졌다"고 판시했다.


이어 "당시 기상 상황, 피해자의 혈중알콜농도, 위에 남아있던 내용물 등에 대한 분석결과 등을 종합하면 피해자는 휴대폰의 최종발신 내역이 남아 있는 2009년 2월1일 오전 3시 8분께부터 2~3시간 내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2009년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의 피의자 박모씨(가운데 모자 쓴 이)가 지난해 5월16일 오전 경북 영주에서 체포돼 이날 오후 제주공항을 통해 동부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09년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의 피의자 박모씨(가운데 모자 쓴 이)가 지난해 5월16일 오전 경북 영주에서 체포돼 이날 오후 제주공항을 통해 동부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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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선고 받은 살해 용의자 박 씨 "우리 가족 발 뻗고 생활하고 싶다."

박 씨는 지난달 27일 열린 1심 최종 변론에서 수사로 인해 삶이 고단해졌다고 토로했다.


박 씨는 "법리적인 것은 잘모른다. 다만 이 사건에 연루돼 형사조사에 응하는 과정에서 나를 비롯한 가족 등 주변인들이 너무나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항변했다.


이어 "내가 체포돼 재판을 받는 동안 부모님이 주변의 시선을 피하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면서 "억울한 심정보다는 제대로 된 판결과 결정이 이뤄져서 앞으로 나와 우리 가족이 발 뻗고 생활할 수 있는 (재판부의)판단이 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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