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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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오늘 이종국(李鍾國)이 죽었다. 대구 사람.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걸쳐 녹을 먹은 자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11월30일 초판을 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4)'의 98~111쪽에 그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일목요연하다. 그의 친일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다.


이종국은 1895년 10월4일 경성부 주사로 벼슬길에 올랐다. 1910년 3월17일 경북 선산군수가 되었다가 경술국치 직후 10월1일자로 조선총독부 선산군수(고등관8등) 명함을 팠다. 경북 신녕군수로 일하던 1909년 11월4일에는 '이등박문추도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세계의 영웅이자 한국의 은인'이라고 찬양하며 도일사죄단(渡日謝罪團) 설립을 역설한다. 1915~1917년 경북 지방토지조사위원회에서 일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침탈과 수탈에 목적이 있었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자제단은 3ㆍ1운동을 조직적으로 와해시키려 한 가장 반민족적 친일단체다.(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3ㆍ1운동 참가자를 잡아들이고 첩보 및 대민 설득을 통해 민중을 만세운동에서 격리시키는 일을 했다. 자제단원은 예외 없이 밀고의 의무를 졌다.(강동진) 자제단이 가장 먼저 생긴 곳이 대구다. 이종국의 부역은 구체적이며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아낌없이 상훈을 내렸다. 1912년 8월1일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11월10일 다이쇼 대례 기념장, 1922년 1월31일 훈6등 서보장, 1926년 4월26일 훈5등 서보장을 주었다. 조선총독부 평안남도 참여관으로 일하던 1927년 7월5일 숨을 거두자 훈4등 서보장을 내렸다. 이종국은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종국의 명이 길어 광복 이후까지 살았다면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별일 없었을 것이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후환을 남겼다. '토착왜구'는 갑자기 튀어나온 좀비가 아니다. 일본의 경제보복 앞에서 "민족주의에만 젖어 감정외교, 갈등외교로 한일관계를 파탄냈다. 일본 정부가 통상보복을 예고해왔음에도 수수방관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자국 정부를 저주하는 인식의 근원은 한 지역이나 한 여성의 가슴 속에만 있지 않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때로 서슬퍼런 주장이 가슴을 후비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교수로 일하는 전우용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내건 글.


"일본의 극우 시위대는 '한국인 꺼져라'를 외치지만, 한국의 극우 시위대는 일장기까지 들고 나옵니다. 이게 양국 간 문제의 핵심입니다. 한쪽은 군국주의 침략자 의식을 계승한 자들이 '애국세력'을 자임하고, 다른 한쪽은 식민지 노예 의식을 계승한 자들이 '애국세력'을 자임한다는 것. 저들의 공통점은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했던 자들의 후예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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