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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시인은 그런 사람, 최후이며 시초

최종수정 2019.06.21 10:09 기사입력 2019.06.2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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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부국장

허진석 부국장

정광호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사무처장(60)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3학년 때 문단에 오른 천재시인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일. 그가 40세 이후에 쓴 시를 읽었다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읽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청년 정광호는 훤칠한 미남에다 재치 넘치는 만담가였다. 후배들에게는 스승과 같은, 실력 있는 선배였다. 그의 눈에서는 푸른빛이 쏟아졌다. 그는 졸업하던 해에 그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말했다.


"나르시시스트와 엄숙주의자, 또는 이 두 가지 경향을 모두 가진 친구들이 문학을 하면 위험하다."

그는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을까. 분노였을까? 별 뜻 없이 멋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의 '선배'란 동물들은 대개 마초였다. 정광호가 대학을 졸업한 뒤 발표한 시가 있다. 1986년 가을 서울 충무로에 있는 카페 '다프네'에서 시화전이 열렸을 때 그도 시를 한 편 냈다. 이렇게 시작된다. "거대한 구두가/나를 짓밟았다/오물을 튀기지 않으려고/내 몸의 구멍이 일제히 닫혔다…."


어쩌면 마지막 작품일지 모른다. '구멍'은 내면과 세계가 소통하는 창이었을 것이다. 창이 나중에라도 열렸는지 모르겠다. 정광호는 굳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진심에 이르는 통로는 넓지 않았다. 눈치가 빨라야 밸브가 잠깐 열리는 틈을 타서 내부를 슬쩍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그가 분노했을 때는 에너지가 지나쳐서 공포감이 스치기도 했다.


그가 참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 하나는 후배를 돌보지 않는 선배, 또 하나는 '척'하는 꼴. 시를 쓸 때도, 술잔을 기울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주먹에 호소했다. 1985년 여름에 그는 서울 인사동에 즐비한 포장마차 중 한 곳에서 조개찜에 소주를 마셨다. 지금은 헐리고 없는 예총회관이 멀지 않았다. 그는 소주잔을 손에 든 채 눈을 번득였다.

"이 조개라는 놈들이 말이야, 아주 야비한 놈들이거든. 사실은 맛이 없는 놈들이야. 살점도 아닌 이 힘줄 비슷한 것들, 요것들이 잘 안 씹히니까 쫄깃하다는 느낌을 줘서 맛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거라구."


[허진석의 책과 저자]시인은 그런 사람, 최후이며 시초

그는 마음속으로 정말 미워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런 자식은 10년이나 20년, 아니 늙은 다음의 초상이 뻔해. 번드르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며 심오한 척 말하겠지. '나도 한때는 시를 썼었지'라며 주위를 꾀려 들겠지." 그의 눈빛은 청산가리 같은 독성을 뿜었다. 그 눈길을 받기만 해도 마비될 것 같은. 정광호는 미래를 증오했을까. 젊은 날 그의 시편들을 기억하는 자에게 '한때는 시를 썼던' 천재의 현존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도저한 질문이다. 누군들 망연해지지 않겠는가. 대통령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전' 자가 붙는데 유독 시인ㆍ소설가는 종생토록 관을 벗지 않는다. 시인이란 '등단했거나 시를 쓰는 사람', '시를 쓰고 있는 중인 상태' 정도에 그치지 않으리라. 신동옥(42)이 호명하는 시인은, 책에서 옮겨 적자면 "망해 버린 공화국의 마지막 인민"이자, "불행한 열정과 희망 없는 사랑을 모두 경험한 다음"을 사는 자이며, 그래서 이미 "죽었고, 죽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자다.


김수영, 신동문, 이성복, 이승훈, 김정환… 에메 세제르, 옥타비오 파스, 마흐무드 다르위쉬…. 채상우(46)가 읽어냈듯, 그들은 최후이자 최초다. 그들은 시를 온몸으로 감행했고 마침내 종결지었으며, 그렇기에 영원한 실패를 자초했고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시인은 태어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다시 끊임없이 소생해야 한다." 시인이 "지구라는 우주의 오아시스에 최후까지 남을 꽃"이라는 거대한 희망은 이런 문맥에서 발원한다. huhball@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신동옥 지음

파란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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