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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반민특위, 끝나지 않은 70년

최종수정 2019.03.28 10:59 기사입력 2019.03.2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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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그의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문귀신'으로 불렸던 노덕술. 그는 조선인 출신 일본 고등경찰이다. 노덕술은 독립운동가들의 심신을 마음껏 유린했다. 일제에 부역한 대가는 달콤했다.


1943년 당시 2만여명의 경찰 중 오늘날의 총경급(경찰서장)인 경시에 오른 조선인은 단 8명. 그중엔 노덕술도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노덕술의 권세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제헌국회는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출범을 이끌었다. 민족반역자를 법으로 응징할 기관이 설립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청산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발족 기념사진. 1948년 10월 23일 국회에서 1차위원회를 소집한 뒤 촬영됐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청산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발족 기념사진. 1948년 10월 23일 국회에서 1차위원회를 소집한 뒤 촬영됐다.



악명 높았던 일제 부역자들이 줄줄이 붙잡혔다. 주사기로 피를 뽑아 이를 몸에 뿌리는 '착혈 고문'의 주인공, 하판락이 체포됐다. 노덕술도 권총과 실탄, 거액의 현금을 지닌 채 붙잡혔다. 일제에 억눌려 살았던 민초들은 반민특위 활약상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반민족 행위자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1949년 6월6일 권력의 묵인하에 경찰관들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20일이 지난 6월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노덕술은 풀려났다.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도 결국 중단됐다. 1949년 10월 반민특위는 해체됐다.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빌어먹고 산다는 자조 섞인 얘기가 민초들 사이에서 퍼졌다.


그로부터 70년 후, 반민특위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어느 정치인의 발언이 문제였다.


"해방 후에 반미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해주실 것을 말씀드린다."


반민특위 때문에 국민이 분열했다니…. 올해 101세의 독립운동가인 임우철 애국지사는 그 발언에 개탄했다. '상수(上壽)'를 넘긴 애국지사는 무엇을 느꼈을까. 이 땅의 진정한 독립을 염원하며 살았던 100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노덕술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가들은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던 역사. 우리는 부끄러운 그 시간에 여전히 살고 있다.




류정민 정치부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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