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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3]파리의 쌀국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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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길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먹거리이지요. 파리에 오니 영화 <바베트의 만찬>(1987)에 나오는 ‘카이유 엉 사코파쥬(Caille en sarcophagi)’가 생각나네요. 메추리 속에 송로버섯과 거위 간을 채워 넣고 빵으로 감싼 다음 오븐에 굽는 요리. 만찬에 초대된 한 장군에 의해서 ‘육체와 정신의 욕구를 감당하기 어려운 정열적인 사랑의 행위’로 묘사되는 요리입니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한 맛의 향연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증오와 원한을 버리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요. 황홀한 냄새.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 입 안 가득 풍만한 느낌. 이성이나 논리 이전의, 영혼이 활짝 꽃피는 이 생명 충동 현상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식사하는 이들 모두를 사랑하게 되는 음식. 이런 마법의 요리가 실재한다면 누구든지 먹어보고 싶을 테지요. 하지만 이 요리는 예술가의 환상 아닐까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음미하게 될 ‘기대의 환상’ 말입니다. 눈을 빨리 현실로 돌려야 합니다. 천재가 창안한 특별 요리가 아닌 일상의 전통 요리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아시안 음식거리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저를 유혹하네요. 비좁은 실내.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 서른 명도 채 못 앉는 손바닥식당에선 낯선 이들끼리 서로의 살 냄새를 맡으며 앉아야 합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창. 우중충한 B급 정서 풍기는 파리의 동남아시아. 여기는 베트남의 어느 허름한 도시 시장판 안쪽의 영락없는 골목식당이지요. 메뉴는 포(PHO)와 보분(BO BUNP) 두 종류. 포는 미트볼이 들어간 소고기 쌀국수, 보분은 각종 채소류와 롤과 볶은 고기와 견과류가 얹혀 있는 비빔국수입니다.


자리에 앉아 옆 테이블에 나온 음식을 보니 침부터 고입니다. 여주인은 인자하고, 상냥하게 미소 짓고, 아무 급할 것도 없이, 눈과 손으로 말합니다. 포와 보분만 구분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지요. 신혼부부, 유학생, 각국의 여행객, 현지 시민들이 어우러져서 B급 손바닥식당은 늘 북적거립니다. 국수가 되기 전의 쌀들이 그런 것처럼, 단위 면적당 밀도가 높은 촘촘한 공간을 오랜만에 경험합니다.


생각해보니 쌀과 아시아와 부지런한 손놀림과 수학은 어쩔 수 없는 형제 가족입니다. 유럽의 밀농사는 밭을 ‘가는’ 것이고, 아시아의 쌀농사는 논에서 ‘짓는’ 겁니다. ‘대충’과 ‘정성’의 차이지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웃라이어』(2009)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의 아이디어인데 꽤 흥미롭습니다. 1년에 3천 시간 이상의 노동을 들여야 되는 쌀농사. 부지런한 끈기의 인간을 만들 수밖에 없는 아시아적 먹거리 생산 문화의 전통. 손이 부지런한 것처럼, 끈기 있는 삶의 환경이 수학을 잘하게 한다는 주장입니다.

유럽 파리에서 만나는 아시아.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아시아를 침략했을 때 동원한 논리인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B급 아시아의 슬픔이 겹쳐 떠오릅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1850년대 초에 동양사회를 분석하면서 제시한 모델인데요, 단일한 전제자와 나머지 노예들로 이루어진 폐쇄경제를 비판한 겁니다. 아시아 사회의 역동성을 부정하고, 전횡적이고 정체적이라는 특성을 부여하면서, 후일 식민주의 정당화 논리를 제공하기도 하지요. 여기에 다윈의 진화론이 가세해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가 국제질서에 도입됩니다. B급이 A급에 먹히는 건 자연의 이치다!


이 엉터리 갑질 논리를 뒤집는 이야기가 『아웃라이어』에 있지요. 150년쯤 뒤에 서양의 한 저술가가 아시아인이 똑똑한 이유를 쌀 생산의 문화 전통과 관련시켜 발표한 겁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음험한 논리를 혁파하는 관점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더 반가운 건 논리가 아니라 감각이지요. 빵 대 밥. 반죽된 밀이 하나의 빵 덩어리가 되어 나타나는 식탁과, 쌀이 고슬고슬한 밥이 되어 낱낱의 모습을 유지한 채 올라오는 밥상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밥그릇 속 쌀알들이 펼치는 숫자의 섬세한 향연! 부지런한 손가락과 빠른 눈과 상아빛 뇌세포가 함께 작동하는 프로그램이 아시아인의 몸속에 디자인 되어 있는 걸 직감한 겁니다. 이것은 ‘아시아적 몸의 비밀’이 아닐까요?


미식가들의 도시 파리. 손바닥식당에 옹기종기 앉아서 옆 사람 살 냄새 맡으며 쌀국수를 먹습니다. 쌀이 위대하다는 깨우침이 절로 생기네요. B급 아시아의 역설이지요. 천상의 은하수가 지상의 강물에 비추는 것처럼, 위대한 쌀이 기다란 국수가 되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쌀을 키워낸 부지런한 3천 시간이 함께 들어오고, 끈질긴 인내가 들어오고, ‘짓는’ 치밀함이 배를 가득 채웁니다.


유전자에도 문화적 속성이 있다면, 우리 생애는 쌀국수처럼 길고 끈질기고 부지런할 겁니다. ‘카이유 엉 사코파쥬’ 같은 고급한 음식만이 미식이 아닙니다. 내 몸의 진정한 미식은 3천 시간 동안 손을 바쁘게 움직여 얻은 조상의 음식이 아닐까요? ‘면면약존(綿綿若存)’의 위대한 쌀 문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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