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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눈물의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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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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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동안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와 있다. 오자마자 달려간 곳이 '눈물의 벽(Wailing Wall)'이다.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 유대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헤로데 성전을 헐어버리고 서쪽 벽만 남겨 두었는데, 유대인들이 성전의 서쪽 벽에서 통곡하며 울었다 하여 'Western Wall'이라고도 부른다. 예루살렘이 함락될 당시 벽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벽은 반으로 나뉘어져 왼쪽에는 남자들이 오른쪽에는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다. 유대인들은 들어가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차림을 단정하게 하는 의식을 치른다.


거기서 나는 많은 눈물을 보았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이들이 벽에 이마를 맞대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벽 틈새에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쪽지를 꼬깃꼬깃 접어 끼워 넣는다. 고대의 벽 위에는 비둘기들이 집을 짓고 날아오르고 있고 하늘은 눈이 시린 파란색이다.


벽에 이마를 대고 우는 사람, 앉아서 기도문을 외는 사람, 기도를 마친 후에 뒷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예루살렘의 오래된 거리를 거닐었다. 십자가의 고행과 예수의 눈물과 수난, 죽음이 신화가 아닌 구체적인 역사로 남아있는 곳에서 눈물에 대해 생각했다.

눈물은 오래도록 여성형으로 간주되었다. 울면 여자 같다고 남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민망한 상황이나 잘못을 울음으로 넘기는 이들도 있어서 울음은 때로 비겁한 회피로 간주된다. 울음은 약한 자들의 것으로 치부되어 나 또한 견디기 힘든 일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입술 깨문 적이 많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는 눈물에 대해, 슬픔에 대해, 슬픔의 표현에 대해 억압적인 사회다. 눈물을 지우려 하고 울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눈물이 권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한다.


이곳에 와서 많이 울었다.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을 방문하였을 때는 그들의 처참한 생활이 눈에 들어와 울었고 화려한 성전 뒤 좁은 거리 어느 남루한 가게 앞에서는 낯선 방문자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한 여인의 시선에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매일 드리는 미사 중에 말씀에 울었고, 갈등이 가시지 않은 인간 역사를 생각하며 울었다. 전쟁의 야만을 온 몸에 새기고도 사과 한 마디 못 듣고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하며 울었고, 아들의 늦은 장례식을 눈물로 치른 김용균 청년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었다.


나를 돌보지 못하고 허덕이던 지난 하루하루를 돌아보며 울었고 내 무심에 상처받았을 이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세상의 구석에서 허기진 이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 눈물에는 연령 제한이 없고 눈물에는 지위나 권위가 없고 울음에는 성별이 없다고.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더 울기를 바란다. 더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사회, 우리 역사의 아픈 결들을 쓰다듬고 보듬기를 바란다. 더 울어서 오래 억눌러 왔던 슬픔과 아픔을 털어버리고 기쁨과 결단, 용기 속으로 성큼 나아가기를 바란다.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고 반성을 꾸며내는 거짓 눈물이 아니라 이웃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고 이 아픔의 책임을 나누어갖는 참 눈물 말이다. 그 눈물 속에는 맑은 정화와 속죄와 반성이 깃들어 있다.


눈물에는 성별이 없고 눈물을 나누는 사회는 슬픔 너머 기쁨을, 잘못을 직시하고 새 길을 찾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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