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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군수업자의 아들 노벨, 정말 평화주의자였을까?

최종수정 2019.04.11 08:03 기사입력 2019.01.2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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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 지뢰 및 기뢰 개발자

노벨에게 가장 큰 돈 안겨준 것은 군수용으로 제작했던 '무연화약'


(사진=아시아경제DB)

(사진=아시아경제DB)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노벨상을 제정하고 사망한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전 세계에서 가장 저명했던 이 군수업자의 일대기를 다룬 위인전에는 하나같이 노벨이 본래 평화를 사랑하던 사람이었다고 나온다. 자신에게 붙었던 '죽음의 상인'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노벨상을 제정하고 떠났다는 것이 노벨 위인전의 결말로 정해져있다.


하지만 정말 노벨이 자신에게 붙었던 죽음의 상인이란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하고 괴로워했었는지는 미지수다. 그는 애초부터 군수업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 자신도 일평생 무기를 만들다 죽은 무기 개발자였다. 그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알려진 다이너마이트 역시 그의 아버지가 무기제조를 위해 공장에 들여왔던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더구나 다이너마이트의 성공 다음에 노벨이 개발한 '무연화약'은 세계 전쟁사를 완전히 뒤바꿔버린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이런 인물이 정말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에 쓰이는 것을 두고 괴로워했을까?


노벨이란 인물의 진면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사실상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노벨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Immanuel Nobel)이란 발명가의 일대기 속으로 들어가야한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건축가 겸 발명가였던 임마누엘 노벨은 여러 군수품 발명에 나섰던 인물로 19세기 중엽 당시엔 아들못지 않게 유럽에서 유명인사였다. 1837년에 임마누엘 노벨은 자식들을 데리고 당시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으며, 거대한 무기공장을 차리고 러시아 황실의 후원 속에 갖가지 무기를 제작했다.


크림전쟁 당시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 모습.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였던 임마누엘 노벨은 러시아군에 해군용 기뢰와 육군용 지뢰 등을 개발, 공급하는 군수업체 대표 겸 발명가였다. 어린 노벨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화약을 가지고 놀았으며, 그의 폭약사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사진=위키피디아)

크림전쟁 당시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 모습.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였던 임마누엘 노벨은 러시아군에 해군용 기뢰와 육군용 지뢰 등을 개발, 공급하는 군수업체 대표 겸 발명가였다. 어린 노벨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화약을 가지고 놀았으며, 그의 폭약사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사진=위키피디아)

특히 임마누엘 노벨은 크리미아 전쟁(1853~1856) 당시 러시아측에 자신의 발명품인 지뢰와 기뢰를 공급해 무기사업가로 명성을 날렸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 속에 어린 노벨은 어렸을 때부터 니트로글리세린이나 흑색화약 등을 가지고 놀았으며, 어린시절 흑색화약을 깡통에 넣고 불을 붙여 폭발시키는 장난을 벌였다가 사고를 쳤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사실 다이나마이트의 탄생은 유년시절부터 화약을 만지고 살아온, 이런 노벨 집안의 배경과 맞물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마누엘 노벨이 러시아 측에 공급했던 지뢰와 기뢰는 이미 15세기 중국에서부터 기본 개념이 등장했던 무기였으며, 조선에서도 '매화(埋火)'라는 지뢰와 유사한 무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동아시아 일대에서 개발된 지뢰 무기들은 주로 비격진천뢰와 같이 현대의 크레모아처럼 탄환이나 파편을 적에게 가격하는 개념이었으며, 폭발력 자체는 크지 않았다. 이후 18세기부터 연구가 시작된 지뢰와 기뢰는 크리미아 전쟁을 거쳐 미국 남북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임마누엘 노벨은 러시아 정부의 지원하에 사업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아들 알프레드를 1851년, 미국에 4년간 유학시키며 기계공학 및 화학을 공부하게 했다. 역시 자신의 군수공장 사업을 이어받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노벨이 귀국한 이후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 러시아가 여기서 패배하면서 임마누엘의 공장도 파산하게 된다. 결국 알프레드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은 유럽 각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며 고생을 하다가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일대 유전 개발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면서 다시 가업인 폭약사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된다. 당시는 미국의 서부대개발, 동아시아의 개항과 각종 전쟁, 철도 부설 사업에 힘입어 폭약사업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던 시점이라 다루기 쉬운 폭약에 대한 수요는 넘쳐났었다.


알프레드 노벨을 진짜 갑부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 다이너마이트가 아니라 군수용으로 개발됐던 무연화약, 발리스타이트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무연화약은 기존 흑색화약과 달리 전장의 시야를 가리는 스모그를 발생시키지 않아 각종 화약무기에 쓰였고, 전쟁의 패러다임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사진=위키피디아)

알프레드 노벨을 진짜 갑부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 다이너마이트가 아니라 군수용으로 개발됐던 무연화약, 발리스타이트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무연화약은 기존 흑색화약과 달리 전장의 시야를 가리는 스모그를 발생시키지 않아 각종 화약무기에 쓰였고, 전쟁의 패러다임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사진=위키피디아)



다이너마이트 개발에서는 알프레드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도 공동 개발자로서 많은 연구를 공유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1866년, 니트로글리세린을 보관 중이던 창고의 폭발로 알프레드의 동생인 에밀과 직원, 행인 등이 사망하는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임마누엘은 큰 충격을 받고 뇌출혈로 쓰러져 장애인이 됐다가 6년 뒤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폭약사업이란 가업은 온전히 알프레드의 몫으로 돌아왔으며, 그는 1867년 영국에서 다이너마이트 특허를 취득한 뒤 대대적인 사업에 나선다. 때마침 1870년, 보불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다이너마이트는 날개돋힌듯 팔려나갔다.


하지만 알프레드를 진짜 갑부로 만들어준 것은 다이너마이트가 아니라 아예 군용으로 개발에 뛰어들었던 무연화약인 '발리스타이트(Ballistite)'였다. 1888년에 개발된 이 무연화약은 소총, 대포, 지뢰, 폭탄 등 갖가지 무기에 사용되며 유럽은 물론 대서양 건너 미국부터 아시아에서 일본까지 모든 분쟁지역에 보급돼 수도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쓰였다. 그후 노벨은 세계 제일의 갑부로 떠올랐으며 이탈리아 산레모부터 스웨덴까지 수많은 별장을 거처로 두고, 계절마다 기후가 좋은 곳으로 이동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이런 노벨의 일대기를 보다보면, 위인전에 나온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의 발명품이 무기로 이용되는 것을 마음의 짐으로 여겼다는 평화주의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19세기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했던대로 상호확증파괴가 가능한 무기를 개발하면 전쟁이 오히려 줄어들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의 폭약사업에 대해 "나의 폭약공장이 평화회의보다 먼저 전쟁을 끝낼지도 모른다. 만약 적과 아군이 1초만에 서로를 전멸시킬 수 있게 된다면, 모든 문명국들은 공포를 느껴 전쟁을 외면하고 군대를 해산할 것"이란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있다. 결국 그 역시 아버지와 함께 세계 전쟁사를 뒤바꾼 발명가 겸 군수업자였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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