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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매리스와 치킨 그리고 '그린북'

최종수정 2019.01.10 09:10 기사입력 2019.01.1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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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매리스와 치킨 그리고 '그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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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린북'은 1962년 뉴욕 브롱크스의 한 마을을 비춘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다. 텔레비전 앞에 삼삼오오 모여 미국프로야구 중계를 시청한다. 뉴욕 양키스 팬들이다. 로저 매리스가 타석에 들어서자 흥분한다. "한 방 날려." 전년도 홈런왕이다. 161경기에서 예순한 개를 쳤다. 베이브 루스가 1927년에 기록한 한 시즌 최다 홈런 예순 개(151경기)를 뛰어넘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을 때렸을 때 양키스타디움 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미국의 영웅 루스를 앞질렀다는 이유에서다. 기록을 깨면 가족을 몰살한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심지어 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루스처럼 154경기에서 신기록을 세우지 못하면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매리스는 크로아티아 이민자의 아들이다. 노스다코타 주의 촌구석에서 자랐다. 타석에서 불방망이를 뽐냈으나 직설적인 발언 들으로 뉴욕 언론이나 양키스 팬들과 자주 충돌했다. 그래서 홈런을 치고도 야유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그린북의 주인공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는 매리스와 닮은 점이 많다. 백악관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요청을 받는 피아니스트. 카네기홀 바로 위층에서 호화롭게 지낼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정확한 상류층 영어를 구사하는 등 말과 행동에 고풍이 배어 있다. 그러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당한다. 백인 전용 식당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화장실마저도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한다. 남부로 내려갈수록 억압은 거세진다. 거의 모든 백인들이 그를 재주가 빼어난 흑인 노예 정도로 대한다. 셜리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콘서트 투어를 강행한다. 야유에 시달리면서도 매섭게 배트를 휘두른 매리스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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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정에는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함께 한다. 흑인들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만큼 차별에 익숙한 백인.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셜리의 로드 매니저를 자처한다. 피터 패럴리(63) 감독은 피부색은 물론 생각, 말투, 취향까지 다른 두 사람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들이 고난을 함께 겪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편견을 버리고 화합을 이끌어내는 매개체로는 음식을 배치한다.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 대표적이다. 켄터키 주에 다다르자 발레롱가가 함께 먹자고 제안한다. "냄새가 정말 좋지 않아요? 평생 프라이드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중략) "부탁이니, 한 조각만 먹어봐요." "담요에 기름이 묻으면 곤란해서요." "그깟 담요 좀 더럽히면 어떻다고."
프라이드치킨의 원조는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라는 게 일반적 정설이다. 미국 남부에 정착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닭고기를 오븐에 구우면서 버린 날개와 발, 목 부위를 노예들이 양념과 향신료를 뿌려 기름에 튀겨 먹었다. 조리법은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대중화됐다. 켄터키 주에서 프라이드치킨을 팔던 커널 샌더스가 1952년에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로 건너가 전문 가게 KFC를 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셜리는 흑인이지만 치킨을 혐오스러운 음식으로 여긴다. 하지만 발레롱가의 끈질긴 강요에 맛보고 절로 미소를 짓는다. "한 조각 더 먹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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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치킨을 맛있게 먹은 뒤부터 남부 백인들에게 심각한 차별을 당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피해의식을 덜어내기도 한다. 비참한 흑인사회의 현 주소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화로 떠들썩했던 영화가 가장 조용해지는 순간이다. 주행하던 자가용이 허허벌판의 도로 위에 서 버린다. 냉각수가 없어서 엔진이 과열됐다. 발레롱가는 서둘러 보닛을 열고 고장이 난 곳을 살핀다. 뒷좌석에 앉아 수리를 기다리던 셜리는 창밖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흑인 노예들을 목도한다. 그들도 셜리를 쳐다본다. 모두 셜리와 발레롱가를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할 말을 잃었을 거다. 백인이 흑인을 위해 일하는 광경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니. 셜리도 다르지 않다. 정확히 100년 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령을 내렸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57년이 흐른 현재는 어떨까. 패럴리 감독은 골든글로브 시상식 무대에서 역설했다. "우리는 여전히 분할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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