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문학 거장 로스 맥도널드가 그린 누아르 버전 '위대한 개츠비'

[구채은의 인생소설]블랙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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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세계는 비정하다. 개인은 무력하다. 살인, 도박, 밀수, 유괴, 납치, 사기 등 각종 악(惡)은 도처에 퍼졌다. 현실은 타락했고 가치는 무너졌다. 진실은 가렸다. 세계는 미로 같다. 탐정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의뢰인에게 돈을 받고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직업정신이나 명분은 없다. 탐정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사실을 모으고 추적하지만 알려고 하는 '무엇'은 쉽게 드러나는 법이 없다. 탐정은 고독하며 쓸쓸하다. 세계는 무자비하고 개인은 이를 바꿀 힘이 없다.


로스 맥도널드의 소설 '블랙머니'는 이런 세계관을 머금었다. 무정하고 냉혹한 세계, 거대한 무력감의 세계.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소설 장르의 세계관이다. 소설도 그렇게 시작한다. 탐정 루 아처. 경찰을 하다 그만뒀고 돈을 벌기 위해 사설탐정이 됐다. 선금 300달러와 일비 100달러를 받고 피터 제이미슨의 의뢰를 받는다. 피터는 수상한 외지인에게 홀딱 빠져 약혼을 깬 여자친구 버지니아 문제로 마음이 쓰리다. 그래서 그 외지인 '마텔'의 정체를 밝혀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치정(癡情) 사건이다.

아처는 일을 시작한다. 마텔의 행적을 뒤쫓는다. 마텔을 둘러싼 사람들의 진술은 엇갈리고 충돌한다. 의혹이 짙어지다가도 어떤 진술은 그 의혹을 배반하고 뒤엎는다. 누군가는 마텔이 사기꾼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훌륭한 프랑스 청년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 버지니아의 어머니가 죽고, 마텔도 갑작스럽게 총상을 입는다. 아처는 그의 뒤를 밟을수록 7년 전 죽은 버지니아의 아버지에게 일어난 살인사건과 희미한 연결고리에 다가가게 된다.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와 함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이다. 추리소설 마니아들에겐 거물급 작가다. 누아르 버전의 '위대한 개츠비'란 수식에도 걸맞다. 화려한 미국사회의 단면, 부조리를 그리는 문체가 그렇다. "여기선 거의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답니다. 부분적으로는 샴페인에 취한 분위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과도하게 돈이 넘쳐나서 그렇지, 몬테비스타는 거의 한 세기 동안 국제적인 해안 리조트였어요. 추방된 마하라자가 노벨 수상자와 어울리고 시카코 정육업자의 딸이 남미 억만장자의 아들과 결혼하는 곳."(44쪽) 이런 대목은 '위대한 개츠비'가 그리는 미국사회의 테마와 상당부분 겹친다.

특히 무미건조하게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바라보는 루 아처의 독백을 담은 부분은 이 작품에 흐르는 공기를 상당부분 보여준다. "카지노 안 슬롯머신에 앉은 사람들은 비슷한 체계로 움직이는 듯했다. 돈 찍는 공장 작업라인의 노동자들처럼 왼손으로 25센트와 1달러 동전을 넣고 오른손으로 레버를 당겼다. 아직 수염을 깎지도 않을 만큼 어린, 눈밑이 시커먼 사내애들이 있었고 레버 당기는 손에 작업용 장갑을 낀 여자들 중 일부는 어찌나 늙고 지쳤던지 기계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돈 공장은 일이 고된 곳이었다."(267쪽)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로 촘촘하게 단서를 쌓는 방식으로 플롯을 짜다가도 갑작스럽게 루 아처의 차가운 내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식의 전개가 많다. 탐정소설 특유의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대목도 흥미롭다. "그가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니를 내 의뢰인에게 도로 데려다주는 게 잘하는 일일까 자문하게 되었다. 마텔은 최소한 남자였다. 어쩌면 엘라 말대로 피터에게서 남자가 될 징조가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면 그는 무언가 열등한 존재로, 그저 사람처럼 걸어 다닐 뿐 식욕, 그 자체로 변하고 말았다."(93쪽) 의뢰인이기도 한 뚱뚱한 남자 피터에게 옛 여자친구를 되찾아 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자문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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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수식 없이 빠르고 거칠게 사실만을 쌓아올리는 소설이다. 미국 백인 부유층의 심리와 욕망, 계급 갈등과 위선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뉴욕타임스는 이 소설에 대해 "플롯과 캐릭터가 풍부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대단원은 충격적이며 완전하다"고 평했다. 정통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오묘한 매력에 빠질 준비가 돼 있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로스 맥도널드 지음/박미영 옮김/황금가지/1만3000원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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