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남한산성'은 올해 본 영화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팩션(Faction), 퓨전(Fusion) 이란 이름으로 시대는 물론 국적도 모호한 신종 사극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남한산성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정통 사극이다. 과장하자면 그냥 2시간짜리 EBS 국사 강의를 듣는 듯하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건조하고 정적이다. 그러나 배우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쏟아내는 불같은 에너지는 보는 사람을 위압하는 위력을 뿜어낸다. 김상헌과 최명길이 선조 앞에서 설전을 벌일 때는 무사들이 서슬퍼런 장도를 휘두르며 상대방의 목줄을 노리는 그 이상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남한산성을 본 정치인들은 저마다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해석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영화는 지독히 정치적이고, 현실적이며 놀랍게도 지금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조 정권은 중국만 바라보며 일본의 정세를 '나 몰라라' 하다 무려 31년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대 전쟁을 겪는다. 이로 인해 조선은 역사속에서 사라질 뻔했다.

그런데 불과 30여년 만에 새로 들어선 인조 정권은 중국내 세력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 또 다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맞이했다. 남한산성은 이중 병자호란을 그린 영화인데 이 전쟁이 참으로 오묘하다. 두 번의 왜란은 수십년간 싸운 전쟁이었지만 병자호란은 달랑 석달 간 치러졌다.


그러나 결과는 조선의 왕이 죄인의 옷을 입고 청태종 앞에서 절을 하는 역사상 유례없이 참담하고 굴욕적인 패전이 됐다.


얼마 전 한국과 중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로 불거진 양국간 갈등을 봉합하기로 합의했다. 곧바로 중국인 관광객(요우커)들이 국내 방문을 타진하고, 그동안 박살났던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되살아났다. 사드 악재에 휘청였던 유통기업들과 관광업계에 '다시 찾아온 봄날' 이라는 낙관론이 쏟아졌다.


정말 좋다고 북치고 장구칠 일일까. 사드 보복으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현상을 살펴보자. 명동과 동대문 시장을 가득 매웠던 중국인들이 사라지고, 롯데마트는 중국에서 영업정지를 당했다. 백화점과 호텔 매출이 곤두박질쳤고 재계와 정치권에서는 나라가 끝장이라도 난 듯 난리를 피웠다.


고작 중국인 관광객이 안 오는 것 하나만으로 나라 안에서는 온갖 갈등들이 빚어졌다.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 군대 앞에서 무능한 위정자들이 잘잘못만 따지며 입씨름만 벌이던 병자호란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AD

국내 유통기업들은 요우커가 끊긴 동안 죽을 힘을 다해 판로를 개척했다. 동남아로 눈을 돌리고 대체 수요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중국인 관광객이 다시 몰려온다고 하자 다시 매대에 빨간색 환영 현수막을 내걸 기세다. 인조정권이 병자호란을 겪은 것은 세 번의 앞선 전쟁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안다. 요우커가 언제까지 한국을 찾아줄 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한국 제품을 언제까지 사줄지도 모른다. 한국사람들은 더 이상 일본산 코끼리 밥솥을 사지 않는다. 중국인들도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더 이른 시간안에, 자연스럽게 한국에 발을 끊게 될지도 모른다. 요우커만 바라보며 근시안적인 정책에 부화뇌동한 기업들은 지금도 손해를 메우느라 피눈물을 흘린다. 다시 찾아온 중국인들에게 우리가 웃기만 할 때가 아닌 것은 이런 이유다.


이초희 유통부장 cho77lov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