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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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의 아버지 한 사람이 골목 모퉁이 담배 가게로 들어갑니다.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들고 나옵니다. 사과궤짝을 탁자처럼 당겨놓고, 플라스틱 상자를 끌어다가 걸터앉습니다. 유리컵 가득 술을 따라서 반쯤을 마십니다. 안주라고는, 라면 부스러기를 닮은 과자 몇 점이 전부입니다.


 이른바 '깡술'이지요. 이 모습을 물끄러미 내다보던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와 말을 붙입니다. "쯧, 그렇게 술만 드시면 어쩌누. 안주도 없이." 무슨 말을 더하려는가 싶더니, 이내 돌아서 들어갑니다. 조금 있다가 작은 쟁반 하나를 받쳐 들고 나타납니다. "이거 새로 담근 김치인데 맛이 제법 들었다우. 안주하시구려."

 김치 맛이 예사로울 리 없습니다. 쓴 소주까지 대번에 달게 느껴질 것입니다. 조금 예민한 사람이라면 눈물을 글썽거릴 지도 모릅니다. 공감과 인정과 배려가 고루 담긴 김치 한 그릇이니까요. 궁핍한 시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연민입니다. 내남없이 어렵게 사는 사람들끼리 흔히 주고받던 정입니다. 손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술 한 병을 비우고 일어나면서, 손님이 고마움의 인사를 합니다. "김치 정말 맛있네요. 그냥도 좋지만, 김치찌개 끓이면 꿀맛이겠는데요."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아주머니,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다음에 와요. 김치찌개 해드릴 테니." '아차' 싶지만, 어려운 약속도 아니란 듯 고개까지 두어 번 끄덕입니다.

 손님은 다시 찾아옵니다. 친구까지 데리고 옵니다. 벌써 구면이라고, '김치찌개 먹고 싶어 왔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꽁치 통조림을 집어 주인에게 건네고, 소주 두어 병을 꺼내듭니다. 동행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말합니다. "이집 김치 맛이 끝내준다네." 잠시 뒤, 이들의 술잔 앞에는 꽁치가 들어간 김치찌개가 놓입니다.


 소문은 금세 퍼져나가지요. 가난한 직장인들, 호주머니 가벼운 술꾼들이 모여듭니다. 인정 많고 마음씨 고운 담배 가게 아주머니, 속으론 '이게 아닌데' 싶지만 돌이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싫지만은 않습니다. 잘 하면 그리 손해 날 일도 아니지 싶습니다. 물론, 그래봤자 소박한 욕심이지요.


[윤제림의 행인일기 58]편의점에서 원본보기 아이콘
 '집 반찬 좀 넉넉히 해두었다가, 내놓으면 되는 일 아닌가. 번데기 통조림 데워주고, 북어포 구워주면 될 것 아닌가. 골뱅이에 파나 듬뿍 넣어 무치고. 술집을 마다하고 오는 손님들이니, 점잖게 한잔씩들 하고는 일어설 테고. 아예, 그런 손님들을 위한 테이블 하나를 따로 마련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꽁치 넣은 김치찌개'를 소주안주로 만날 수 있는 담배 가게가 생겨났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서 '북어포에 맥주 한 병' 마시기 좋은 가게도 나왔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한 세대쯤은 지난 후의 일이지요. 한 시절, 맥주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었습니다. 명절 선물용으로도 나가던 고급 주류였지요.


 술값이 넉넉지 않아서, 상점이나 기웃거리던 사람들에게 맥주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런 날들을 지나서 맥주가 치킨과 짝이 되고 동네골목의 술이 될 줄은, 맥주회사도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시간을 함께 데려온 것이 '가게에서 마시는 맥주, 가맥'입니다. 어느 지방도시에선 '가맥 축제'도 열린다지요.


 황태포와 병맥주로 유명한 '가맥집'이 떠오릅니다. 구멍가게는 이제 시늉뿐이고, 본업은 소문난 안주 맛을 찾아오는 손님대접입니다. 촉촉하면서도 노릇하고 바삭한 그 맛을 보려고 줄을 서는 집이지요. 그 장면에 뜬금없이, '가정식백반'이란 말이 얹힙니다. 말하자면 '가맥'은, 가정식입니다. 불쑥 찾아온 손님을 위해 급히 마련한 주안상이 그와 같지 않던가요. 있는 것들 중에 제일 좋은 재료로, 가진 솜씨 중에 제일 나은 솜씨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빨리 마련되는 음식으로 차려 내는 상. 그 앞에서 주인은 손님들에게 자랑 섞인 농담을 할 것입니다. "날마다 저희 집에 오시고 싶어지실까 봐 걱정입니다."


 저는 지금,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박철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안주도 없었을, 이 철없는 시인의 '가맥' 한 잔은 결국 아내를 울리고 맙니다.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라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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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 시인에게 전화를 할까 망설입니다. 미당이 짓고 송창식이 노래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의 가사처럼 그리운 사람이 많아지는 날입니다. 집도, 술집도 아닌 햇살 아래서 맥주 한 잔하기 더없이 좋은 날입니다. 가을은 '가맥'의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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