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고래는 있다 은허(殷墟)의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 안에도 이도백하(二道白河)의 푸르게 망가진 객잔 안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귀신고래는 있다 거품벌레가 문득 풀썩 무심히 뛰어오르는 게성운과 그믐 사이의 얕은 체적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그대의 붕괴된 홍채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자동차보험료영수필증에도 영등포구청의 공무원복무규정집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나 사랑해?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열중하는 애인들의 손길에도, 손길의 모호한 떨림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분명히 귀신고래는 있다 마카로니웨스턴 영화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등자(鐙子)에도, 명랑한 시거 연기에도, 총알이 뚫고 지나기 전부터 자꾸 삐뚤어지며 증발하는 창백한 과녁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그러니까 울산 세죽리 조개무지의 고요와 소란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문풍지처럼 얇고 시리게 밤을 앓는 누군가의 소주잔 안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얄궂은 노릇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곳에도 귀신고래는 있고, 더욱 부인할 수 없는 곳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명왕성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모퉁이마다 질그릇처럼 조그맣게 얼어 터진 미신고 행려병자의 시체와 벽돌 담장 위에서 캄캄하게 흥건한 봄꽃, 귀신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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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한 詩]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32―귀신고래가 있다/오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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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있다. 귀신고래는 있다. 저 은나라 때의 거북이 등짝에도 있고, "자동차보험료영수필증"에도 있다. 그리고 있다.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열중하는 애인들의 손길에도" 있고, "문풍지처럼 얇고 시리게 밤을 앓는 누군가의 소주잔 안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우리의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고래 사냥」) 귀신고래는 있다. 미결재 서류함에도, 바닥난 통장 잔고에도, 당신이 아직 다 걷지 못한 퇴근길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당신을 향해 헤엄쳐 오는 귀신고래가 있다. 당신을 향해 문득 바닷속을 뚫고 솟아오르는 귀신고래가 있다. 당신 마음속엔 아직 귀신고래가 살고 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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