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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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라디오에서 이런 퀴즈를 들었습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2절 첫머리에 나오는 '남산'은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요? 보기를 드리지요. 서울 남산, 경주 남산, 나주 남산, 충주 남산, 삼척 남산…." 보기가 주어지니 더욱 알쏭달쏭했습니다. 맞히는 이가 드물더군요.


 정답은 '이 땅 위의 모든 남산'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입니다. 남산이 어딘들 없겠습니까? 남산은 마을 앞산입니다. 날마다 눈을 맞추는 동네 산입니다. 풍수에서 말하는 안산(案山)입니다. 농담을 섞자면, 이층집보다 한 뼘쯤 높은 산입니다. 야트막해서 노인도 아이도 한달음에 오르는 산입니다.

 '봄이 오면' 진달래 피는 산입니다. '울긋불긋 꽃 대궐'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살던 고향' 산입니다. 그 산엔 으레 소나무가 서 있게 마련이지요. 어느 시인이 '살구꽃 피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고 했는데, 저도 흉내를 내보고 싶어집니다. '남쪽에 산이 보이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천리의 남산 대표를 뽑으라면 결국 이 산이어야 할 것입니다. 목멱산(木覓山). 이 나라 수많은 산성과 읍성 남대문들의 대표는 '숭례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지요. 그런 점에서, 서울 남산에다 세상 모든 남산 소나무들을 모아 놓고 우러르는 뜻은 퍽이나 장하고 갸륵해 보입니다.

 저는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제 고향 소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조선의 모든 소나무들이 모두 모여 서있는 숲입니다. '팔도 소나무 단지.' H호텔에서 국립극장 쪽으로 돌아가는 '둘레길' 언저리입니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심은 것들이라지요. 당연히 아무나 데려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서울로 보낼 나무들이니, 고르고 또 골랐을 것입니다. 그래선지 하나같이 늘씬하고 잘 생겼습니다. 지리산 벽송사 '미인송', '장군송'이 생각납니다. 소설 '토지'의 무대, 평사리 들판 '부부송'도 떠오릅니다. 통의동 '백송'이나 영월 청령포 '관음송'처럼 역사를 지켜온 나무들도 어른거립니다. 실제로, 반가운 얼굴도 보입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47]소나무 숲에서 원본보기 아이콘
 정이품송의 '맏아들(長子木)'입니다. 제법 무성하게 자란 아들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아직은 어린 나무입니다만, 그 기품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인간이나 식생(植生)이나, 자손이 있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목숨임을 알겠습니다. 누가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푸른 빛깔로 꿈틀거리게 하는지 알겠습니다.


 언젠가, 속리산에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소나무 끝에 걸린 초저녁달이/법고(法鼓)처럼 운다/소나무가 운다 소 죽은 귀신이 운다//저 산발치 무논들에서/그런대로 숨통은 틘 보은벌까지/우리 아니었다면/뉘 갈아엎었으리 /소 죽은 귀신이 운다/말티고개 열두 굽이로 속리산 문장대까지/우리 아니었다면/뉘 청산 이뤘으리//(하략)"


 제 생각에, 소는 죽어 틀림없이 소나무가 될 것만 같습니다. 둘은 삶과 죽음의 모습이 너무도 닮았습니다. 소는 대지를 푸른 생명의 들판으로 바꿔놓습니다. 소나무는 모여서 청산을 이뤄냅니다. 살아서 온몸으로 일하고, 죽어서 온몸을 다 내어줍니다. 이 나라 민초(民草) 아니, '창생(蒼生;백성)'의 생애 또한 그러했지요.


 '초식(草食)의 짐승'과 '늘 푸른 나무'를 닮은 '풀꽃 같은 사람들'. 셋은 얼마나 가까운 사이입니까. 우리가 소와 소나무에게 배운 것도 많습니다. 소에게선 '덕'을 배우고, 소나무에게서는 '지조'를 배웠습니다. 소나무의 '변치 않음'에 대한 칭송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요. 장자(莊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받은 본성을 지켜 땅 위에 홀로 겨울이나 여름에 푸르러 있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뿐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받은 본성을 그대로 보전하기 때문에 스스로 믿어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본성을 지키며 사는 목숨, 걱정스러운 의구심도 일어납니다. 소나무는 제 삶이 지루하거나 권태롭지 않을까요.


 소나무라고 해서 왜 진력이 나지 않겠습니까. 철 따라 옷을 바꿔 입는 색색의 나무들이 어째서 부럽지 않겠습니까. '에버그린(evergreen)'의 운명이 명예롭고 자랑스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무겁고 고단한 일일 테지요. 애국가에 나오는 나무답게, 삼백육십오일 내내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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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렇게 외롭고 심심한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박재삼 시인이 말합니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하략)"


 마침, 소나무 잔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바람이 소나무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주고 있습니다. 소나무가 온몸을 비틀며 웃습니다. 소나무와 노는 바람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천년의 바람'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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