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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샅샅이 읽기① "5.18때 간첩 개입 추측", 전씨 자신도 첨 듣는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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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 표현은 역사 왜곡…5.18을 민주화운동이라 규정한 건 고착화된 통념" 주장도


"군인의 길 이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나에게 운명처럼 그렇게 나라의 부름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역사로부터 '호명' 받아 나선 것이라 스스로의 과거를 회고했다. 이 회고록을 둘러싼 논란은 또 다른 사실이 밝혀질 수록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가운데, 전두환 전대통령 측은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군인의 길 이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나에게 운명처럼 그렇게 나라의 부름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역사로부터 '호명' 받아 나선 것이라 스스로의 과거를 회고했다. 이 회고록을 둘러싼 논란은 또 다른 사실이 밝혀질 수록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가운데, 전두환 전대통령 측은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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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의 외피를 갖추고 있지만, 전두환 회고록의 과육은 묵시와 계시 중간 선상에 놓여있다.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며 12·12와 5·18과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사역'과 '불가피'을 논하다가도 대통령 취임과 집권 후 행보는 '나라의 부름'이자 '운명'이라 말한다. 집권 직전까지 파란만장했던 순간들은 그 위에 섰던 고인들을 소환해 그 입을 빌려 모조리 속뜻을 알 수 없는 묵시의 영역으로 끌어냈다가, 스스로 주인공이 된 집권 후 역사에 대해서는 베일을 벗고 나와 계시의 실행 영역으로 풀어놓는다. 누군가의 수모와 한사(恨死)는 시대의 요청에 의한 불가피한 상황의 산물이 되고, 그에 따른 비판 제기에는 제물을 자처하며 역사를 굿판으로 치환시킨다. 능란한 회피와 희석의 화술에 넋을 놓고 읽다 보면 10·26 이후 대한민국은 아포칼립스 상황이며, 전두환 자신은 거스를 수 없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는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리기 마련이다.

12·12 군사 반란은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이 쿠데타 이후 신군부는 정치적 실세로 정치무대로 떠올랐다. 사진 = 12·12 당시 광화문에 배치된 신군부 휘하 병력.

12·12 군사 반란은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이 쿠데타 이후 신군부는 정치적 실세로 정치무대로 떠올랐다. 사진 = 12·12 당시 광화문에 배치된 신군부 휘하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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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가 쿠데타? "비애 느껴"
전두환 씨는 자신이 주도한 12·12를 쿠데타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는 역사 왜곡'이며 자신이 목숨까지 걸었던 당시 상황의 당위성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비애를 느낀다'고 항변한다. 그는 "12·12가 어느 날 급작스럽게 '쿠데타'로 규정된 것은 김영삼, 김대중 씨가 평화적 정권 교체의 수혜자로 집권자가 되었을 때"라고 설명한 뒤 "12·12는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책임자인 내가 합수부장으로서 시해범 김재규의 내란에 동조한 혐의가 명백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조사하기 위해 연행하던 중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었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러나 1979년 11월 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하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은 일각에서 제기된 정승화 사령관 연루설에 대해 "김재규가 정 총장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설득하거나 살해할 생각이었으며, 오히려 정 총장이 사건 초기 신속하게 조치해 김 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시 합수부장은 전두환 본인이었으며, 불과 한 달 만에 자신이 직접 발표한 수사결과를 뒤집고 정승화를 체포하며 군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 집권 직전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던 전두환의 D-day. 그래픽 = 이진경 디자이너

▲ 집권 직전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던 전두환의 D-day. 그래픽 = 이진경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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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씨는 당시 자신의 심경에 대해 "12·12 당시 나에게 정권 장악의 의도가 있었다면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인데, 훗날 '쿠데타 했다'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10개월간 목숨 건 '곡예'를 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며 '정권 찬탈'의 시발점으로 사건을 규정하는 시선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전씨는 자신이 5·18과 관련한 계엄군의 작전지휘체계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줄곧 주장해왔으며, 회고록을 통해서는 당시 광주에 북한군이 개입 됐다는 의혹에 무게를 싣고 있으나 지난해 한 인터뷰를 통해 북한군 개입 여부는 들은 바 없고, 당시 광주 계엄군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는 친서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 신빙성이 의심받는 상황이다. 사진 = 5·18 기념재단 제공

전씨는 자신이 5·18과 관련한 계엄군의 작전지휘체계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줄곧 주장해왔으며, 회고록을 통해서는 당시 광주에 북한군이 개입 됐다는 의혹에 무게를 싣고 있으나 지난해 한 인터뷰를 통해 북한군 개입 여부는 들은 바 없고, 당시 광주 계엄군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는 친서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 신빙성이 의심받는 상황이다. 사진 = 5·18 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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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북한 특수군이 개입한 폭동

회고록 출간 전부터 세간의 관심은 5·18에 대한 그의 입장에 집중됐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을 5·18의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라고 비유하며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규정한 것은 '고착화된 통념'이라고 평가해 공분을 샀다.

전 씨는 먼저 5·18을 '광주사태'라 명명한 뒤, "당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고 못 박으면서도 당시 상황을 회고록 1권의 1/3 가까이 할애하며 상세히 설명한다.

그는 5·18의 배경을 두고 "5.17조치로 김대중 씨가 국기문란 혐의로 체포되자 그의 집권을 통해 오랜 기간 쌓여온 지역적 한을 풀어보겠다는 열망이 한순간에 무너진 데 대한 호남인들의 좌절감과 분노가 깊었을 것"이라고 유추한 뒤 "'발포 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광주 출동을 명령받고 이동하던 20사단의 지휘부차량을 무장시위대가 탈취했고, 아세아 자동차 공장 습격 및 이후 조직적 무기고 습격에 이용된 사실은 5·18사태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미전향 장기수들, 엄중한 정치범들, 간첩들을 해방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 짚으며 "북한의 고정간첩 또는 5·18을 전후해 급파된 북한 특수전 요원들이 개입한 것"이라 추측했다.


5·18 당시 도청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소준열 사령관은 광주 시내 시위가 한창이던 5월 2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공수부대원들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 지나친 질책은 곤란하다'는 친서를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전달 받았다고 과거 인터뷰를 통해 증언한 바 있다. 사진 = MBC 뉴스 화면 캡쳐

5·18 당시 도청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소준열 사령관은 광주 시내 시위가 한창이던 5월 2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공수부대원들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 지나친 질책은 곤란하다'는 친서를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전달 받았다고 과거 인터뷰를 통해 증언한 바 있다. 사진 = MBC 뉴스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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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지난해 4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5·18 당시 북한군 침투 관련 정보보고를 받은 적 있냐는 질문에 "전혀, 오늘 처음 듣는다"고 답했던 바 있어 회고록의 신빙성에 의구심을 더하고 있는 상황. 아울러 당시 계엄군 작전계획 관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달리 5.16일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다음날 전군주요지휘관회의 개최를 요구한 사실이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5.17사건 조사결과보고서를 통해 확인됐는데, 이 회의 직후 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국무회의를 거쳐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결의됐다.

또한, 5·18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 소준열 장군은 1995년 MBC와의 인터뷰에서 "5월 24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서를 자신에게 전달했으며, 내용은 '공수부대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였다."고 밝혀 "광주의 작전상황 관련 조언이나 건의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전 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반증한 바 있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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