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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시] 수선화를 묻다/이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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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한 수선화에 세 들었을 때
수선화 노란 가루를 온몸에 쓰고 수선인 척 있을 때
수선화 꽃 색은 얼마나 노란가 듣도 보도 못 했을 때

그때, 내가 한 수선(水仙)에 세 들었을 때
수선(水仙)의 낮은 하늘을 나는 제비나비 한 마리에 없는 속을 다 내줄 때
문득 독침 같은 바람이 와 수선화 노란 물기를 다 걷어 가는 줄도 모를 때
수선화, 수선수선 물기 걷히고
녹아내릴 듯 짓무른 목을 가까스로 가누고 있을 때
(중략)

수선화 자태는 얼마나 애틋한지
세 살 적 처음 본 냇물처럼
채 도착하지 않은 햇살처럼 애틋해서
내가 그만 늙은 수선 한 잎으로 슬그머니 흘러내리고 싶을 때

어느 캄캄한 회음부를 후룩 빠져나온 물이여
꽃물이여
거기가 어딘가

아득하고 희고 푸르고도 노란, 그러나
북명(北溟)보다 검고 희고 완강한 그 어른거림이 과연!

■이 시는 나르키소스 이야기에 기대 있는 듯하다. 나르키소스는 매우 아름다운 청년이었는데 맑은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만 반해 샘가를 떠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핀 꽃이 수선화라고 한다. 수선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중앙에 노란 꽃이 하나 있고 그 둘레를 눈처럼 하얀 꽃잎들이 짝사랑하듯 에워싸고 있다. 다들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이야기로부터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단어가 유래했고 그 뜻은 '지나친 자기애'다. 그런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어 보면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생각보다 비극적이다. 그의 출생이 그렇기도 하지만,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오래 살 것이라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 실은 그의 운명을 이미 결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북명보다 검고 희고 완강한 그 어른거림"을 말이다. 그래서인가. "채 도착하지 않은 햇살처럼" "수선화 자태는" 보면 볼수록 또한 "얼마나 애틋한"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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