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을 쌓은 人文의 둥지
박이문의 학문적 업적 망라한 '인문학 전집 특별판' 발간
문학과 철학, 사랑과 지혜, 삶과 죽음 등
일생에 거쳐 응축한 '둥지의 철학' 체계화
초판은 작년 2월 양장본으로 발간
특별판은 청년층 부담 없도록 가격 확 낮춰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시골 논두렁길을 따라 삭막한 서울의 뒷거리를 방황하던 나는 어느덧 소르본대학의 낯선 거리를 5년 동안이나 외롭게 서성거린다. 파리의 좁은 길이 로스앤젤레스의 황량한 길로 연결되고, 그 길은 다시 보스턴의 각박한 꼬부랑길로 통했다. (…) 논두렁길에서 시작된 나의 길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길고도 짧았다. 어느덧 내 삶의 오후가 왔음을 의식한다. 약간은 아쉽고 초조해진다. 갈 길은 더욱 아득해 보이는데 근본적 문제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나의 길, 나의 삶' 중)
우리시대의 철학자. '인문학의 마에스트로'로 불리는 박이문 선생이 1990년 6월1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이 글은 1990년대 후반 고등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선생은 이 글에서 '배움'에 대한 갈증과 소망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겸손하다 못해 반성적인 그의 고백은 청소년마저 '삶, 그리고 앎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했다. "답은 없다. 세상엔 만 개의 문제, 만 개의 대답이 있다. 인생은 둥지 짓기다. 다만 네 스스로 답을 찾아 자기 존재를 명명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같은 선생의 가르침에 누군가는 '소크라테스의 현신'을 떠올렸다.
최근 선생의 모든 학문적 업적을 망라한 '박이문 인문학 전집 특별판'이 발간됐다. 선생이 20대 시절인 1950년대 후반 발표한 시부터 최근까지 60여년 동안 남긴 글을 발간 당시 원형과 제목을 유지하면서 주제별로 추려 묶었다. 병석에 있는 박 선생의 동의를 받아 선생과 오래 인연을 맺어온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 정대현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강학순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철학교수,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등이 모인 전집발간위원회가 구성했다. 초판은 지난해 2월 선생의 여든일곱 번째 생일(2월26일)을 맞아 양장본으로 총 1000질을 찍었다. 이번 특별판은 초판 발간 1주년과 선생의 희수(喜壽)를 기념해 문고판으로 내놓은 것이다. 젊은 세대가 부담 없이 볼 수 있도록 간편한 디자인에 가격을 낮췄다.
강학순 안양대 교수(64)는 22일 아시아경제 인터뷰에서 "한 개인이 일생 동안 탐구하고 모색한 업적들이 전집으로 발간된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했다. 시간 속에 유실되거나 흩어져 버리기 쉬운 개별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정돈됨으로써 긴 수명을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학문의 발전과 계승으로서 학계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했다. 전집이야말로 그 사회 학문의 깊이와 폭을 상징하고 우리는 이런 선집과 전집의 창을 통해 한 시대의 정신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강 교수는 "학문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학문 세대 간의 계승 작업이 효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이것은 흡사 여러 사람이 연속으로 달리는 계주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박이문 전집은 문학과 철학, 실존적 지향과 의미 추구, 사랑과 지혜, 삶과 죽음, 동양철학과 현대 분석철학 등 그가 일생에 거쳐 응축한 '둥지의 철학'을 체계화했다. 1978년 발간된 단행본 제목이자 박 선생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하나만의 선택(1권)'으로 시작해 '나의 문학, 나의 철학(2권)' '동양과 서양의 만남(3권)' '철학이란 무엇인가(4권)' '인식과 실존(5권)' '죽음 앞의 삶, 삶 속의 인간(6권)' '예술철학(7권)'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8권)' '둥지의 철학(9권)' '울림의 공백(10권)'으로 마친다.
강 교수는 둥지의 철학편에 담긴 추천사에서 둥지의 철학이 자연(소재)과 인간(구성)의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썼다. 인간은 자기의 둥지(거주지)를 짓고 사는 존재다. 이 둥지는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삶의 보금자리다. 또한 명사가 아닌 동사이다. 강 교수는 "인간은 삶의 세계를 구성하고 건축하는 구성ㆍ예술적 존재, 그리고 자신이 그린 설계도를 끊임없이 수정해가는 과정적 존재, 자연과 사회 속에서 타인을 만나며 관계의 그물망을 만들어가는 관계적 존재"라고 했다.
이런 삶의 여정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둥지를 짓고자 하는 '철학ㆍ예술혼(魂)'을 갖고 시시포스처럼 분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는 "철학의 탐구는 현실을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정초지우고 그것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지적 충동과 열망의 산물"이라면서 "철학과 삶은 다른 길이 아니라 한 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류종렬 미다스북스 대표가 올해 문학사상 1월호에 쓴 '남기고 싶은 말-박이문을 대신하여'에는 일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파킨슨병 때문에 언어를 잃어가고 있는 원로 철학자의 마지막 사유가 담겨 있다. "나는 지금 환자복을 입고 영원한 부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로 시작하는 글은 '나의 근황' '다음 세대를 위하여' '끝으로 남기는 말'이라는 부제 아래 펼쳐진다.
"인생은 시인 천상병의 말대로 '잠깐 온 소풍'이다. 병원은 인생이 잠깐 쉬어가는 소풍지다. (…)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금도 별과 구름, 산과 바다, 새와 꽃을 노래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자주 사무친다. (…) 비록 모든 꽃나무가 언젠가는 시들거나 늙고 죽어 썩게 마련이지만, 꽃을 한 번이라도 피우고 죽는 나무와 그렇지 않은 나무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 우리의 인생을 꽃에 비할 수 있다면 같은 값이면 보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다."
박이문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2월 충남 아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그해 사상계에 '회화를 잃은 세대'라는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리고 동 대학원에 진학해 스물일곱 살에 '폴 발레리에 있어서 지성과 현실과의 변증법으로서의 시'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 졸업 후 이화여대 전임강사로 발탁되지만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유학 후엔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내외 대학에서 수십 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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