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의 걸음이 삼각지에 이르렀다. 골목 안에 움튼 작은 국수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인 듯한 할머니가 부지런히 국수 그릇을 날랐다. 사나이는 눈치를 보아가며 구석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좀전의 분노와 배포는 간곳없이 사라졌다. 국수가 나왔다. 허겁지겁 한 그릇 다 먹으니 할머니가 그릇을 거둬갔다. 국수와 국물을 한가득 다시 내왔다. 다 먹었다. 이제 큰일 났다. 사내는 몰래 달아날 궁리를 했다. 주인이 천천히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이때다! 사내는 구르듯이 국수집 문을 빠져나왔다. 주인이 황급히 따라나와 뭐라고 소리쳤다. 무슨 말인들 귀에 들어왔겠는가. 용산역까지 달음질쳤다. 휴~ 살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가쁜 숨이 잦아들자 아까 등으로 들은 할머니의 고함, 그 다급한 목소리가 사나이의 머리에 비로소 도달했다.
"뛰지 마! 다쳐!"
서울 삼각지 뒷골목에 있는 '옛집'이 이 이야기의 무대다. 2006년에 신문기사를 읽었으니 11년 전이다. 당시 국수값은 2000원, 지금은 3000원. 텔레비전에 여러 번 소개되어 꽤 유명한 집이 되었다. 하지만 국수집의 맛과 인심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 잊었던 이 이야기를 나는 지난주 일요일 서울 세검정 성당에서 열린 사순절 특강 때 들었다. 그리고 어린 날 등 뒤로 듣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아, 어머니는 왜 무심한 듯 지나치는 듯 골이 난 아들의 등에 목소리를 새기셨을까. "얘야…" 오래도록, 어쩌면 내가 삶을 마칠 때까지 지울 수 없는 그 음성, 음성의 지문, 음성으로 새긴 지도(地圖)! 고집덩어리 아들은 얼마나 자주 눈물을 삼켰던가. 그때 왜 얼른 돌아서서 그 품에 뛰어들지 못했던가. 어머니는 지금 다른 세계에 계시고, 나는 이따금 어머니가 내 등에 새긴 사랑의 흔적을 찾아 오래오래 눈을 감고 시간여행을 한다. 죄송하게도 힘들 때면 더욱 절실하게.
등 뒤에서 울리는 그 분의 음성은 그래서 거룩하나니, 살아 계시거든 뜻을 받들 일이요 이미 떠나셨거든 잊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