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외할머니는 설 명절이면 1만1000원을 세뱃돈으로 주셨다. 만 원짜리는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저금통으로 직행할 것을 알았던 외할머니는 손녀에게 천 원이라도 용돈을 쥐어주고 싶으셨던 거다. 이처럼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쇨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누구나 추억을 안고 있는 '세뱃돈'이다.
세뱃돈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중국에서 시작돼 우리나라와 일본, 베트남으로 퍼졌다는 게 통설이다. 서기 11세기 북송 시대 음력 1월1일이면 결혼하지 않은 자녀에게 돈을 담아 건네는 중국인의 풍습을 세뱃돈의 기원으로 여긴다. 이 때 악귀와 불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세뱃돈을 훙바오(紅包·붉은색 봉투)에 넣어 주던 전통 문화는 지금도 이어진다.
재밌는 것은 세뱃돈과 정보기술(IT)이 만나면서 명절 풍습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으로 세뱃돈을 주고받는 이른바 '모바일 훙바오' 시대다. 이를 주도하는 나라는 IT 강국으로 통하는 미국이나 한국이 아닌 중국이다.
첫 테이프는 '중국판 카카오톡'인 웨이신(微信·위챗)을 운영하는 텅쉰(騰訊·텐센트)이 끊었다. 2014년 텅쉰은 스마트폰에서 한 번에 0.01~5000위안까지 송금할 수 있는 모바일 훙바오 서비스를 개시했다. 웨이신 채팅창을 통해 모바일 훙바오를 보내고 받는 이가 빨간 봉투 모양의 훙바오를 터치하면 돈이 우수수 떨어지는 그래픽이 뜨고 세뱃돈이 온라인 계정에 쌓인다.
이번 춘제(春節·음력 설) 기간인 지난 27일 웨이신즈푸를 통한 세뱃돈 전송은 142억건에 달했다. 지난해보다 76% 급증한 것으로 역대 최고치다. 28일 자정 무렵에는 초당 오간 세뱃돈이 76만건에 달할 정도로 이용자 수는 빠르게 늘고 있다.
더욱 재밌는 것은 모바일 훙바오가 증강현실(AR)과 만나 한 단계 더 진보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텅쉰과 알리바바, 바이두 등 IT 대표 기업의 모바일 훙바오 대전이 하나의 볼거리로 자리 잡았는데, 올해 춘제에는 세계적 인기를 끈 '포켓몬 고(GO)'를 본 딴 '훙바오 고' 열풍을 이들이 주도했다.
알리바바의 지불 결제 플랫폼 즈푸바오(支付寶·알리페이)에서 'AR 훙바오' 기능을 실행하면 스마트폰 위치 탐색과 카메라 촬영 기능을 활용해 특정 지점 밑에 숨겨진 훙바오를 찾도록 했는데 포켓몬 고 서비스에 굶주렸던 중국인이 열광하기 충분했다. 한 네티즌은 "포켓몬 고와 유사한 게임을 할 수 있어 재미도 있고 세뱃돈까지 받아 기쁨이 배가 됐다"고 했다. 공교롭게 우리나라에서는 설 연휴 기간 포켓몬 고 광풍이 불었다.
정성껏 준비한 세뱃돈을 주고받는 게 익숙한 우리나라 정서상 모바일 훙바오는 대체하기 힘든 문화일 수 있다. 하지만 전통 문화에 편리와 재미를 더 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유연한 사고와 확장력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무시할 수 없는 경쟁 요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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