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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광장의 시민정신, 일상으로 뿌리내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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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형 국민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이은형 국민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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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눈송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분명히 기온은 내려갔는데, 체감온도는 따듯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사람들은 분노를 가지고 모여들었지만, 해학과 즐거움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구호와 피켓으로 단호한 의지를 표출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롭고 움직임은 질서정연했다. 다섯 번째 촛불 집회가 열린 지난 광화문의 이웃사촌 모습도 앞선 집회와 비슷했다. 한 마디로 정의하거나 요약할 수 없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경이를 보여주며 점차 진화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의 높은 시민의식이었다. 약자를 배려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해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에게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주는 모습, 주위에 있는 어린 아이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며 보호막을 쳐주는 모습, 지하철역 환풍 시설 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위험하다며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잡아주는 모습. 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이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동네 이웃사촌인 것처럼 챙겨주는 모습이었다. 집회가 끝난 후 시민은 폴리스라인에 서 있던 의경을 포옹하기도 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넘쳐났다. 유니폼을 갖춰 입고 형광 봉을 흔들면서 길을 만드는 공식 자원봉사자만 자원봉사자인 것은 아니었다. 화장실을 찾거나 대형 모니터 설치 장소 등을 물어보면 자기 일처럼 열심히 찾아주었고, 정보를 공유했다. 각종 모임이나 단체에서, 심지어 개인이 자발적으로 양초, 피켓 등을 나누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광장에서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고 만나는 사람이 남이 아니었다. 쓰레기를 줍고 광장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었다.

집회 횟수가 거듭될수록 깃발이 다양해졌는데 그 내용을 보면 역시 신세대답다는 감탄이 나온다. ‘독거총각 결혼추진위원회’ ‘문과생존 원정대’ 등은 우리 시대 청년들의 어려움을 유머로 승화시킨 깃발이다. ‘얼룩말 연구회’ ‘장수풍뎅이연구회’ ‘범야옹연대’는 심각한 상황을 살짝 비틀어 가볍게 터치하는 신세대의 감성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최근 인기를 모으는 게임 ‘오버워치 심해유저연합회’라는 깃발도 있다. ‘무한상사 노동조합’ ‘안남시민연대’ 등은 TV 인기예능 프로그램 또는 영화와 연관이 있다. 기발하고 위트 넘치는 이 깃발들은 ‘민주노총’ ‘서울대교수협의회’ ‘연세대민주동우회’ 등의 진지한 깃발과 함께 광장을 새로운 느낌으로 수놓고 있었다.

촛불 집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퇴진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로 삼기는 하겠지만, 그래서 정치, 사회, 경제 분야의 개혁을 하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원하는 만큼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백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양희은씨와 함께 상록수와 아침이슬을 부르는 장면, 1분 소등,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다시 영롱하게 빛나는 촛불 파도를 보면서 나는 ‘공동체 의식’이 회복될 가능성을 보았다.
앞으로 몇 번의 촛불 집회를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집회를 통해 우리는 ‘나’가 아닌 ‘우리’를 생각하는, 약자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불공정과 부패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정의로움, 거짓말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서로 확인했다. 촛불 집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광장에서의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치부하지 않기를 바란다. ‘광장에서의 우리’를 경험한 수백의 사람들이 불씨가 되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고, 더 따듯해지기를 기대한다.







이은형 국민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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