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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의 책 다시보기] 바람 불어도 꺼지지 않는 촛불에게 권함

최종수정 2016.11.21 09:42 기사입력 2016.11.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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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 '박사성이 죽었다' & 고승철 '여신'

 지금의 사태를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것인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현 세태를 예민하게 반영하고 풍자하는 소설 두 권이 출간됐다. 하나는 통쾌한 승리담을 담은 '판타지'인 반면 다른 책은 진흙탕 같은 우리 현실의 민낯을 담은 '사실화'다.

 '박사성이 죽었다'는 권력 비리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선택한 비리의 '깃털'박사성이 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통한의 메시지다. 정치권과 재벌, 언론이 어떻게 부패의 순환고리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북칼럼니스트로서 '최보기의 책보기'를 쓰는 작가는 평소의 서평에서 보여준 특유의 맛깔스런 문체로 통렬한 풍자와 해학을 구사한다. 남해안 가상의 섬 형제도 출신으로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된 친구의 힘을 빌어 호가호위하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박사성이 정권이 바뀐 뒤 검찰에 쫓기는 몸이 되자 도주해 은신하다 바다에 투신한 흔적을 일부러 남긴 후 노숙자로 변신해 도시로 잠입한다. 그런데 한 달 후 남해안에서 우연히 박사성과 꼭 닮은 변사체가 발견되면서 장례식까지 치러지는 통에 박사성은 영락없이 산 귀신이 돼버린다. 죽었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는 사람인 비리의 '깃털' 박사성은 자신의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과 외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형 비리의 종말과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턱이 닳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개도 안 온다'는 냉정한 인간 세태를 풍자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음'을 이용하는 철면피들의 이기심,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의 기쁨, 슬픔, 아름다움이 뒤섞인 가운데 삶의 태도에 대한 진지한 교훈도 읽을 수 있다. 작품 속 인물들 하나하나는 바로 이 시대를 때로는 비루하게 그러나 대개는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 그대로다.

 박사성의 종말은 '최순실 사태'를 꼭 닮았다. 박사성이 끝내 절규하는 메시지는 '살아보면 결국 가족과 친구밖에 없더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잘하며 살고, 덕성을 쌓으며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펄펄 뛰는 영호남 사투리와 속이 후련하게 뻥 뚫리는 육두문자가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마다 사정이 다르다.' 작가는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이 첫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싶었다, 고 첫 문장에서 말한다. 이 소설이 안나 카레니나만큼의 명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지만 최소한 안나 카레니나엔 없는 것, 톨스토이에겐 없는 것들이 이 책과 작가에게는 꽤 있는 듯하다.

 '여신'은 50을 넘긴 나이에 '공맹(孔孟)의 정원'인 언론계에서 '노장(老莊)의 황야'인 창작판으로 뛰어들었다는 언론인 출신 고승철 작가의 네 번째 장편 소설이다. 전작들인 '은빛 까마귀''개마고원''소설 서재필'에서 보여준 것처럼 현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섞으면서 고금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웅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탈리아의 로마, 밀라노, 나폴리와 오사카, 홍콩, 마카오 등 여러 국제도시가 작중 무대로 등장한다.

 젊은 시절 영화관 '간판쟁이'였던 주인공 탁종팔은 자수성가에 성공해 부초그룹의 회장이 된다. 그는 그룹을 운영하는 한편 부초미술관을 세워 국보급 미술품들을 모아들인다. 겉으로 보기엔 부자의 호사스러운 취미인 듯하지만 탁 회장의 야심은 거대하다. 바로 '헬조선'의 구조 자체를 확 뒤바꿔 버리는 것이다. 북한지도자와 담판을 벌여 한반도 평화를 이루겠다는 '돈키호테'식 반란까지 도모한다.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면모가 흥미롭다. 탁종팔을 비롯해 장다희, 민자영, 마동출, 도민구, 갈용소 등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데 특히 탁종팔과 함께 또 다른 중심축을 맡고 있는 장다희와 민자영은 소설 제목이기도 한 '여신'의 표상들이다. 전수학교 중퇴 출신의 장다희는 탁 회장에 의해 부초미술관 관장으로 발탁된 언어의 천재다. 그녀는 사회변혁을 꿈꾸는 야심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부터가 누군가와 비슷하지 않는가. 바로 잔다르크를 본딴 것이다. 아예 명성황후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민자영은 경국지색급 미모의 룸살롱 마담 출신이다.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두 여인 모두 이른바 '흙수저'출신이다. 작가는 이들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주인공들'이라고 표현해 놓았는데, 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변화의 주체는 결국 '우리'라는 것을, 이 소설이 흙수저들에 대한 통쾌한 응원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27년간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 만난 온갖 인간 군상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런 인간 군상들의 파란만장을 '사실'을 전달ㆍ논평하는 언론에선 맘껏 펼쳐 보일 수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 이상의 '가공(架空)의 진실'을 추구하는 소설에 매료됐던 게 아닐까.

 작가는 자기소개에서 "항구도시에서 '촌놈'특유의 터무니없는 호연지기를 키우며 자랐지만 대학 진학 이후엔 서울 아파트에 살면서 야성(野性)을 잃었다"고 썼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죽었다던 야성은 다시 살아난 듯하다. 앞으로 좀 더 많은 작품에서 그 '야성'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명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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