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배 한 척만 남은 22일 아침, 부두에는 아직 1만 5천 명에 가까운 인파가 강추위 속에서 간절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바다 위에 떠 있던 마지막 배가 부두에 접안하고 피난민을 맞이할 준비를 마칠 즈음 아침에 만난 미군이 헌병 지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중략)… 기적처럼 배에 자리를 잡고 나자 일순간에 긴장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리가 좁아도, 허기가 져도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임길순은 그때 다짐했다. "이번에 살아날 수 있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그 다짐이 60년 역사를 지켜온 성심당의 정신이요 철학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전에 자리잡은 임길순은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를 밑천으로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찐빵을 만들어 팔았다. 성심당의 시작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성심당은 비교할 곳을 찾기 어려운 문화를 간직한 채 건강하게 운영되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상생'. 성심당의 건물 외벽에는 수도꼭지 하나가 바깥으로 나와 있다. 매장 앞 포장마차들이 물을 편히 쓸 수 있도록 일부러 바깥으로 설치한 것이다. 제과업계 가운데 처음으로 주5일 근무를 도입했고 전 직원에게 매출을 공개한다. 이윤의 15%는 직원에게 성과보수로 지급한다. 인사고과의 40%는 '동료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평가 기준이라고 한다. 이 빵집은 가급적 지역의 농산물을 재료로 사용하고, 항상 신선한 빵을 제공하기 위해 네 시간이 지난 빵은 팔지 않는다. 포장재도 친환경 종이를 사용한다. 책을 낸 출판사의 이름은 '남해의 봄날'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다. 사무실이 통영에 있다고 한다. '남해의 봄날'에서는 책 소개를 이렇게 썼다.
'성심당은 단순히 유명 빵집이 아니다. 대전의 최부자집으로 불리며 성심당 덕분에 대전 시내에 굶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오랜 시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빵을 나누어 왔다. 하루 빵 생산량의 3분의 1을 기부하고, 매달 3000만 원 이상 빵을 기부하는 성심당은 1956년 대전역 노점 찐빵집으로 시작해 400여 명이 함께 일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가 "성심당의 철학과 경영방식이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 중소기업 100개가 생겨난다면 대기업 중심의 한국경제 구조 자체가 바뀔 것이다"라고 극찬한 성심당은 어떻게 대전 시민의 자부심이자 한국 경제의 대안으로 주목받게 된 것일까? 갑작스런 화재로 성심당이 잿더미가 된 상황에 기적적으로 회생하는 이야기에서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하며, 메가히트 튀김소보로와 연일 신제품을 쏟아 내는 흥미진진한 개발 스토리는 '제빵왕 김탁구'를 능가한다. 교황의 식탁을 위해 빵을 만들고, 한국 베이커리의 역사이자 동네 빵집이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모두가 행복한 경제를 이뤄가는 기적의 스토리.'
눈에 띄는 곳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곳. '1999년은 IMF 외환위기가 터진 지 2년도 채 안 되던 시기로 사회 전체가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기업들은 회사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인건비부터 손을 댔다. 명예퇴직과 정리 해고가 범람했고, 그 결과 가정이 파괴되고 노숙자가 폭증했다. 경영난에 빠진 성심당도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문가들은 직원 수와 제품 수가 너무 많아서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인건비를 줄이고 제품의 종류를 단순화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부는 이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쳐내는 구조조정 대신 매출을 더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릴 때 친구들과 모여 떠들곤 하던 곳, 여자 친구를 만난 곳도 빵집이다. 여드름이 난 사내애들은 적은 돈으로도 양을 채울 수 있는 '곰보빵'을 자주 사먹었다. 여자친구를 만나면 단팥빵이나 크림빵, 잼 같은 것이 들어가 달콤한 제과점빵을 주문했다. 우유를 함께 주문하곤 했다. 어느 날 여자 친구에게 바람을 맞고 정신이 나간 나머지 계산도 하지 않고 빵집에서 나온 기억이 난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근처에 있는 작은 빵집, 옥호가 '상록수'였는데 나는 종로서적에 가서 새로 나온 책을 뒤적일 때에야 정신이 들어 무전취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나를 바람맞힌 여자 친구는 평생에 걸쳐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빵에 대한 나의 기억은 여자 친구보다 내 아버지에게로 직결된다. 나는 성심당 이야기를 읽으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농구선수 김유택 씨만큼 키가 커서 어디를 가든 구경거리가 되었던 거인. 그가 내 방에 들어와 별 말 없이 책상에 빵 봉지를 내려놓고 나가던 어린 날의 저녁, 그 뒷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요즘도 빵을 자주 먹는다. 특히 주말이면 아침 일찍 빵을 사다가 구워 커피와 함께 먹는다. 한번도 빵이 싫지 않았다. huhball@
<김태훈 지음/남해의봄날/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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