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는 TV 토론과 관련된 하나의 징크스가 있다. 토론 돌입 직전 지지율 격차가 5% 포인트 미만인 박빙 상황일 경우 1차 토론을 제압한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쥔다는 거다. 며칠전 열린 미국 대선 1차 TV 토론은 두 후보간 지지율 격차가 불과 1% 포인트인 상황에서 실시된 터라 전세계의 관심하에 진행됐다.
트럼프가 이번 토론에서 점수를 잃은 주된 원인은 쟁점과는 무관한 동문서답이나 쟁점을 벗어난 저함량 답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토론에서 확인된 후보자의 정책철학이나 이념, 자질 등에는 별 관심이 없는 유권자가 거의 절반에 달한다는 전제에서 보면, TV토론이 실제 선거결과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거나 상당히 제한적일 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는 유권자의 선택에 관한 ‘어리석은 유권자’ 가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리석은 유권자에 대한 호소는 상당부분 객관적이거나 이성적인 논변보다는 동정, 증오, 공포 등 심리적 측면에 집중하여 행해지는 특징이 있다. 집토끼들은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일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을 움직인 다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는 식으로 견강부회를 하게된다. 감성이 앞서가고 이성이 뒤치다꺼리를 하는 ‘콘크리트 지지’의 모습이다.
음주운전하지 말라는 B의 지적에 대해 A가 “사돈 남말 하지 말라. 자네도 지난번에 음주 운전했잖아”라고 대거리하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B가 지난번에 음주했다는 이유로 A가 음주운전하는 것이 정당화되는가. 다시 말해 B의 지적이 온당치 않다고 믿는가. 그렇게 믿고 있는 C가 있다면 C는 받아들여서는 안될 주장을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고, A는 C를 오류에 빠트리는 책략에 성공한 것이다(인신공격-피장파장의 오류).
마찬가지로 A가 “내가 ‘인간은 타락하였다’고 할 때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타락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을(우물) 비판함으로써(독뿌리기) 반론 제기 자체를 불능케 하여 자신의 주장을 지키고자 하는 불공정한 전략이다(우물에 독뿌리는 오류).
논리학교과서에 소개되는 것만으로 충분할 이런 황당 궤변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접하는 요즘이다. 짧은 기간 동안 기업들로부터 수백억 원을 출연 받은 ‘미르’만 봐도 그렇다. 충분히 이유있는 의혹제기에 대해 “요즘 같은 ‘비상시국’에 근거 없는 비방을 쏟아놓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일갈한다. 이는 이유 있는 의혹제기에 대해 우물에 독 뿌리는 궤변에 해당한다.
한 달 넘게 국민을 피로감에 빠지게 한 우병우 민정수석 케이스도 마찬가지다. 우 수석과 관련된 몇 가지 이유 있는 일탈 위법행위에 대한 한 신문의 문제제기에 대해, 해당 신문 주필의 일탈 위법 행위 폭로와 함께 부패기득권언론의 주장일 뿐이라고 대응한다. 공격에 공격으로 맞서는 형국인데 그 모양새는 피장파장 궤변이다. 이후 이 신문은 스스로 ‘말할 자격’을 갖추고 말을 하는지 반성하겠다는 알쏭달쏭한 주필의 반성문을 발표한 뒤 잠잠하다.
진정한 소통에 이르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 입각한 대화나 토론 등이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콘크리트 집토끼들이 이성을 회복해 ‘똑똑한‘ 유권자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길은 요원하다.
류을상 논변과소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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