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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문화 프리즘] 종무지와 덕혜

최종수정 2016.08.26 10:46 기사입력 2016.08.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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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오른쪽)와 종무지.

덕혜옹주(오른쪽)와 종무지.

영화 '덕혜옹주'는 매력적인 배우 손예진(34) 씨의 뛰어난 연기와 관객동원능력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역사왜곡' 시비로 인해 영화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관심을 모았다. 가장 비판받은 부분은 덕혜옹주를 독립운동가처럼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 비판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영화 속의 덕혜옹주는 일본옷(기모노) 입기를 거부하고 망명을 시도하며 동포 앞에서 조선인으로서 긍지를 잃지 말라고 연설한다. 기록에 없는 얘기다. 옹주는 일신소학교에서 기모노를 입고 공부했다. 한글학교를 세운 적도 없다. 영화는 옹주가 광복 직후 이승만 정부가 귀국을 막자 그 충격 때문에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옹주의 조현병은 어머니(양귀비)가 죽은 이듬해(1930년)부터 나타났다. 열여덟 살이었다. 정신분열증은 자연인 이덕혜를 불행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해 12월 25일 대마도에 갔다. 부산에서 배를 탔다. 작고 조용한 마을, 아늑한 바닷가에서 쉬었다. 덕혜옹주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대마도는 옹주와 인연이 각별한 곳이다. 옹주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 가문의 근거지이다. '덕혜옹주결혼봉축비'는 한국인 관광객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관광 가이드로 일하는 한국인을 비롯한 대마도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영화가 일본과 소 다케유키를 오로지 악(惡)으로만 묘사할까봐. 특히 소 다케유키를 극단적으로 나쁜 인물로 표현할까 우려했다. 한국에는 그가 아내를 정신병원에 처넣은 뒤 이혼해 버렸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내가 대마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백작이 옹주를 극진히 보살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라고 했다.

소 다케유키. 그는 '종무지'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들에게 첫 선을 보인다. 한자 이름을 우리의 독음으로 읽은 것이다. 동아일보는 1930년 10월 31일자 2면에 옹주의 정혼 사실을 보도했다. 종무지는 11월 초순에 옹주와 처음 대면한다고 했다. 11월 23일자 2면에 양가가 합의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1931년 5월 9일자 2면에는 8일 오전 결혼식을 했다는 소식이 있다.
결혼을 둘러싼 분위기가 어땠는지 분명하지 않다. 영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1984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쓴 회고록에 따르면 1930년 가을에 종무지와 옹주의 결혼이 추진될 때 영왕 내외가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옹주의 병을 고치는 것이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왕은 옹주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는 '저들'의 속셈을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이 여사도 "옹주가 소망대로 공부를 마치고 조선에 가서 교사생활을 하며 조선사람과 결혼해 사는 것이 행복할 것 같았다"고 썼다.

옹주의 조현병은 매우 심각했다. 이방자 여사는 1931년에 옹주의 병세가 좋아져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지고 사람을 알아보고 식욕도 좋아졌다"고 적었다. 옹주는 결혼 얘기를 듣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고 한다. 이 여사는 결혼식 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옹주를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동병상련이었을 수 있다.

결혼식을 전후해 찍은 사진을 보면 종무지는 훤칠한 미남이다. 나중에 레이타쿠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일한 영문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옹주와의 일에 대해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옹주와 결혼한 1931년부터 이혼한 1955년, 그리고 딸을 잃는 1956년까지 25년 세월을 '인생의 공백기'라고 했다. 옹주가 귀국한 뒤인 1972년 낙선재를 방문했지만 옛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

몇 조각 편린이 반짝인다. 1932년 8월 14일, 종무지와 옹주 사이에 딸이 태어난다. 이름은 정혜(正惠ㆍ마사에). 옹주의 이름 중 한 자(惠)가 들어갔다. 딸의 이름에서 종무지의 마음을 본다면 억지일까. 그는 딸을 극진히 사랑했다. 그림을 잘 그려서 1983년 7월 6일부터 12일까지 도쿄 긴자의 마츠자카야 백화점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딸의 어린 시절 초상화 넉 점을 걸었다. 섬세한 붓놀림에 사랑이 가득 담겼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에게 영원한 아픔을 남기고 떠났다.

정혜는 1955년 일본인과 결혼했는데 이듬해 8월 26일 유서를 남기고 가출한다.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종무지는 죽을 때까지 딸의 사망신고서를 내지 않았다. 작은 항아리에 진주 한 알을 넣고 상자에 담아 장례식을 갈음했다. 1976년 7월, 그는 '진주'라는 시를 발표한다. "여름 산 푸른 잎 우거진 길을 넘어갔으리. …그날 그 언저리에 비가 내렸으리라./조금만 더 가면 길이 끊기니 … 하늘로 날아갔을까, 하얀 비둘기처럼…"

종무지는 1985년 4월 22일에 삶을 마친다. 생전에 '사미시라(さみしら)'라는 시를 남겼다. 1956년 4월에 출간된 종무지의 첫 시집 '해향(海鄕)'에 실렸다. '사미시라'는 외로움, 쓸쓸함을 뜻한다고 한다. '대한제국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를 쓴 혼마 야스코(本馬恭子)는 이 시를 종무지가 덕혜옹주를 그리며 쓴 시라고 확신했다. 추려 읽는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 빛바랠 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 나의 넓지 않은 가슴 한편에/그 소녀가 들어와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인 것을 …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칠월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정처 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깊은 밤 도회지의 큰길에 서면/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사미시라'는 30연 120행으로 되어 있다. 혼마는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 역시 120행으로 되어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그는 썼다. "'한(恨)이란 … 슬픔과 괴로움의 감정이다. … '장한'은 '영원한 한'이라는 의미다. 덕혜옹주와의 비극을 스스로 노래한 시인 소 다케유키의 노래이며 절창(絶唱)"이라고.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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