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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단弄단] 오직 이름으로만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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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가상의 기사를 생각해보자. "...박근혜 대통령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만난 자리에서 … 박 대통령은… 오 전 시울시장에게…." 나는 ‘이름 + 타이틀’의 순서를 반대로 하고, 처음에 타이틀을 밝힌 후에는 이름으로, 그리고 이름으로’만’ 부를 것을 제안한다. 즉, “… 대통령 박근혜는 전 서울시장 오세훈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는… 오세훈은…”으로 말이다.

우리 언어에서 호칭이 갖는 문제점은 첫째, ‘성+직위’의 형태를 띠는 구조는 성이라는 씨족집단과 직위라는 조직 내 위치로 개인을 특정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성립이라는 근대 이후의 시대정신에 어긋나고, 둘째, 화자와 청자의 위계질서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김과장’‘김과장님’, ‘길동아’, ‘길동형’모두 두 사람의 위계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친인척간에 쓰이는 형/오빠 같은 호칭을 사회 전체로 확장해서 쓰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우리말의 호칭은 대화 참여자의 권력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 간의 수평적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존댓말 사용까지 고려한다면 수평적 의사소통은 매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존댓말 구조를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선 호칭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과거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히딩크는 묘한 상황을 발견한다. 운동장에서 선수들이 말이 없다는 점이다. 후배가 선배를 ‘길동형’뭐 이렇게 불렀을 텐데, 호칭이 대화의 장애로 작용한다고 판단한 히딩크는 경기 중에 서로를 오직 이름으로만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름 뒤에 붙는 ‘형’혹은 ‘~아/야’와 같은 꼬리를 떼어버린 것이다.

의사소통이나 조직관리에서 호칭으로 인한 불편함은 한계점을 넘었다. 오죽하면 모 기업에서 영어이름을 쓰기로 했을까?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도 사회 관습과 관성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야 한다. 호칭을 바꾼다는 것, 언어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사회의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변화를 뜻한다.

이 정도의 어젠다를 주도할 수 있는 집단은 국가밖에 없다. 몇몇 실행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모든 미디어에서 사람을 이름으로만 부르자. 미디어는 대부분 공적인 사안을 다루므로 경어를 쓰지 않는다. 설령 대통령이 주어인 경우에도 ~하였습니다라고 하지 ~하셨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즉, 타이틀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을 때 들 수 있는 ‘건방진’느낌으로부터 자유롭다. 아시아경제부터 실천해 주기를 바란다..
둘째, 공무원, 정치인들이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르도록 하자. 적어도 공무원은 국가의 피고용인이므로 국가 정책으로 강제할 수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사적인 자리에서도 서로를 형님/동생으로 부르는 것을 금지하자. 무슨 깡패집단도 아니고….
셋째, 초등학교에서부터 동료 및 선후배를 부를 때뿐만 아니라 교사를 부를 때조차도 이름으로, 그리고 이름으로만 부르도록 가르쳐야 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이름으로만 부르는 방식이 자리잡으면 민간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유행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고 열광적이다. 상황에 따라 뒤에 ‘님’혹은 ‘씨’정도의 접미사를 붙일 수는 있다. 신문 기사는 이름으로만 쓰는 것이 어색하지 않지만, 뉴스에서는 “… 이에 대해 안철수씨는 내일...”등으로 말하고, 토론에서는 “저는 홍길동씨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매끄러울 수 있다. 이런 세세한 사항은 우리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분위기가 정착된다면 자연스럽게 각각의 상황에 맞는 방식이 자리 잡을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적인 공간에서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게 될 날을 꿈꿔본다.



마진찬(사회비평가)
[論단弄단] 오직 이름으로만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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