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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당대최고 스님을 돌머리로 비웃은 추사

최종수정 2016.08.08 14:22 기사입력 2016.07.01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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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스토리 - 추사와 백파와 석전, '풍자와 독설'의 릴레이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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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마재 마을의 절간 선운사의 중 백파한테 그의 친구 추사 김정희가 만년의 어느날 찾아들었습니다.
종이쪽지에 적어온 '돌이마(石顚)'란 아호 하나를 백파에게 주면서.
'누구 주고 싶은 사람 있거던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파는 그의 생전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아껴 혼자 지니고 있다가 이승을 뜰 때, "이것은 추사가 내게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가 임자를 찾아서 주라"는 유언으로 감싸서 남겨놓았습니다.
그것이 이조가 끝나도록 절간 서랍 속에서 묵어오다가, 딱한 일본식민지 시절에 박한영이라는 중을 만나 비로소 전해졌는데, 석전 박한영은 그 아호를 받은 뒤에 30년 간이나 이 나라 불교의 대종정 스님이 되었고, 또 불교의 한일합병도 영 못하게 막아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면 보이는 추사가 글을 지어쓴 백파의 비석에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준 아호 '석전'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싸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 "야! 단수 참 높구나!" 탄복한 것이겠지요.


추사와 백파와 석전 /서정주


이 시를 읽고는 내 눈이 번뜩 뜨였다. 추사가 백파선사(1767-1852)에게 써준 호(號)가 이 분에게 갔구나. 나는 모르고 있었다. 꽤 오래전 이 시를 읽었으면서도 그땐 추사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던 때라 옛날 사람들 이야기로구나 하고 지나갔다. 이제 보니 그게, 그게 아니다. 나는 순간 흥분이 된다. 추사에서 백파로, 백파에서 박한영(왼쪽의 흑백사진)으로, 박한영에서 서정주로 이어지는, 아주 조붓하고 예쁜 시(詩)의 길을 엿보는 기분이다. 이래서 주워들은 자투리라도 앎은 달콤하다. 시만 읽어도 대강 인연이 짐작된다. 나는 백파에서 미당으로 이어지는 선운사와 동백의 인연 또한 심상치않게 느껴진다.
석전(石顚)은 무슨 뜻일까. 나는 여기에 추사의 못말릴 유머감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돌 石에 이마 顚이니, 미당은 그걸 '돌이마'로 번역했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한 말은 돌이마가 아니라 '돌대가리'이다. 석두라고 쓰지 않고 석전이라고 쓴 것일 뿐이다. 제주 유배시절 그렇게 피터지게 논쟁을 벌였던 백파에게, 말년의 추사는 저 대서횡자(大書橫字)를 써서 불쑥 건넸다. 피끓던 시절의 분노와 혐오마저도 우스워졌을 때 쯤이다. 미당 말대로 선운사로 찾아갔는지, 아니면 서울 근처로 올라온 백파를 만났는지는 모르겠다. 내용으로 봐서는 찾아가서 준 것 같지는 않다. 터억, 하니 썼다. "돌대가리". 내 오랫 동안 노사(老師)와 논의를 해보니 그대에게 지어줄 이름은 이것이오이다. 이런 류의 독설은 추사가 백파에게 쓴 편지들 속에 흥건하다. "보내온 글이 갑자기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을 보면 스님이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 모양이니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입안의 밥알이 튀어나와 책상에 가득하오이다." 이렇게 대놓고 비웃었던 추사이니, 그럴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당시 선불교의 최고봉이었던 백파는, 이 두 글자를 다르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화두와 선(禪)을 명태 씹듯이 씹어돌리던 추사가 드디어 한 소식을 얻었구나. 돌로 된 머리를 가진 것은 바로 부처이다. 절의 많은 불상(佛像)들이 돌로 된 것을 보지 않았던가. 부처의 차디찬 이마. 그 찰나의 얼음같은 깨달음. 그것이 '석전'이 아닌가. 정녕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시작이요, 온기를 가진 삶과 인간을 진실로 이해한다는 것은 저 온기없는 돌의 마음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또한 석전은 인간이 지은 것들과 인간이 이룩한 인위들은 오히려 번잡하여 깨달음을 방해할 뿐이라는 통찰을 품고 있다. 석전은 부처의 이마가 아니라 그냥 돌의 이마이다. 인간은 눈을 속이고 마음을 홀리려 부처를 돌 위에 새겨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부처일 수는 없으며 헛된 믿음이요 부질없는 우상을 뿐이다. 수천 년 부처는 돌 안에 들어앉아,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바로 자신의 형상을 지우고 있다. 비를 불러, 바람을 불러, 혹은 꽃잎 하나를 불러, 추위와 더위를 불러, 불상을 천천히 뭉개고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이 부처가 아니라, 바로 그 돌 안에 들어있는 차가운 마음 하나 그것이 진실로 부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게 추사가 써준 '석전' 속에 들어있는 오묘한 뜻이 아닌가. 그러니 감히 내가 어찌 이 호를 쓸 수 있겠는가. 나는 이보다 어리석다. 어쩌면 이 시대에는 이 호를 감당한 돌의 마음이 없는지 모른다. 고민 끝에 백파는 '돌대가리'를 쓴 종이를 가만히 싸서 죽을 때 이름에 꼭 맞는 사람을 찾아주라고 말한다.

미당은 이 대목에서 시적인 감흥이 왔을 것이다. 캬. 이름에 꼭 맞는 사람을 공간에서 찾는 게 아니라 시간에서 찾다니...세상을 읽는 스케일을 알겠구나. 미래에 올 사람에게 딱 맞는 옷같은 이름을 예비해놨다가 선물하는 마음. 멋지지 않은가. 이것은 추사가 글씨 하나의 고의(古意)를 찾지 못하여 20년 간이나 쓰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침계'의 호를 써주기 위해 그는 그토록 오래 찾아헤맸다), 투철함도 포함되어 있다. 미당의 기꺼움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백파의 호를 건네받은 박한영(1870-1948)이 바로 미당에게 크게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던 스승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승님이 추사의 지은 옷을 입었구나. 그런 흐뭇함이 시에 배어있는 것이다. 미당은 시에서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추사는 백파가 죽고나자 그의 묘비에 대기대용의 비라고 썼다. 백파가 평소에 펼치던 지론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오래전 추사는 백파에게 이런 구절을 써서 어퍼컷을 날렸다.

"더구나 입만 열면 대기(大機)에 대용(大用)이요, 마음이 발작하면 살인과 활인을 꺼내지만 이 땅의 풍광에 대기대용을 어디에다 쓸 것이며 맑고 평온한 세계에 살인과 활인으로 무엇을 할 것인고? 대기 대용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긴 것도 충분히 가소로운 일이고 살인 활인은 한 때의 기(機)에 해당하는 말인데 어찌 상투적으로 답습하여 평소의 능사로 삼으려는 겁니까."

그러니까 대기대용은 이 땅에서 맞지도 않은 말이며 그것을 두 사람의 조사에게 나눈 것 또한 엉터리라는 논박이다. 그런데 왜 백파가 죽고나서 그의 비석에 그 말을 기꺼이 써줬을까. 추사가 너그러워져서 그런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 깨달음이 익어서 그런가.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갑작스런 변화인지라 어리둥절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미당은 저 '대기대용'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용처에다 썼다. 저 '돌대가리' 호를, 백파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큰 기회 혹은 큰 때에 크게 쓰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대는 작은 시간 단위가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어떤 시간을 택했고, 크게 쓰는 것은 가장 적임자를 만나서 호를 제대로 쓰는 것이 크게 쓰는 것이니 과연 대용이다. 추사가 백파를 보고 "야! 단수 높구나"했다는 건 미당의 상상력인데, 그렇게 진짜 말했다면 추사는 백파의 대기대용을 그제서야 인허해준 셈이 된다.

그렇다면 이 괴짜같은 호를 물려받은 '석전'은 어떤 분이었는가. 그는 일제 당시 불교의 쇠락을 극복하기 위해 인재불사(人才佛事)를 벌여 대중흥의 기틀을 다진, 전설적인 학승이다. 그는 동대문 밖의 개운사에 강원과 불교학교를 세웠다.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 오세창 안재홍 김복진 서정주 신석정 등 당시의 지식인들이 대거 몰려든다. 불교의 정신적 지주가 된 청담과 운허도 여기서 공부를 했다.

학인들의 찬사를 들어보자.
"석전 스승을 만나매 그는 내전(內典)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 게 없을 만큼 박식하다"(최남선)
"대관절 박한영과 함께 길을 가면 한국땅 어디로 가나 그는 모르는 게 없다. 산에 가면 산이야기 물에 가면 물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 간에 그의 화제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정인보)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석전은 한용운과 함께 불교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인다.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이 조선불교를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통합하려고 했던 계획을 차단한 것이다. 이후 끈질긴 이회광 일파의 유혹과 압박을 물리쳐서 그 음모를 무위로 만든다. 1929년에 조선총독부는 그간의 계획을 철회하고 조선불교의 7인대표를 교정(敎正)으로 뽑는다. 거기에 박한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석전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불교전문학교 교장과 조선불교 교정을 맡았다. 해방후 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된다.

그는 엄격한 계율주의자였다.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몇 있다. 하나는 만해 한용운과의 논쟁이다. 만해는 스님들이 결혼을 하도록 허용하자는 주장을 했다. 그가 '불교유신론'을 쓸 무렵이었다. 전통교리를 지키던 비구들에게 이 의견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동정비구였던 박한영도 그랬다. "지옥이란 곳이 있다면 너같은 놈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승려가취론 때문에 조선의 중들 다 망쳐놓을 놈이니까..." 석전의 호통에 만해는 급히 주장을 철회했다. "아이구. 제가 조선의 중들 망치려고 그러겠습니까. 세상은 바뀌는데 불교는 조금도 달라지려 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그런 것이지요." 변명은 했지만, 만해의 그 주장은 그때 이후로 쑥 들어갔다. 이 논쟁을 보자면, 맹렬한 원칙주의자이고 고식적이고 융통성이 없다는 점에서 백파와 좀 닮은 구석이 있다.

또 하나는 오징어사건이다. 박한영이 지계엄정(持戒嚴正)에 관해 강의를 한다. "계율은 집의 주춧돌과 같습니다. 수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향기로운 꽃을 몸에 두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누군가 교탁에 갖다놓은 과자를 무심코 집어 삼킨다. 오물오물 씹으며 그는 말한다. "허, 그 일본과자 맛이 아주 고소하구나." 그때 학인 하나가 대답을 한다. "그것은 과자가 아니라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는 생선과 같은 것인데 그걸 잡수셨으니 계를 위반한 셈입니다. 그에 관하여 법문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그것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박한영은 잠깐 미소를 지어보인 뒤 "나는 과자를 먹었고 너는 오징어를 먹였으니 계를 위반한 것은 너이니라"라고 말한다. "잡수신 분은 스승이 아니신지요?" "허허. 갓난아이 손에 인두를 쥐어주면서 덥썩 잡은 아이의 잘못이라고 하겠느냐 쥐어준 어른의 잘못이라고 하겠느냐." 그는 다시 설법을 이어간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사려깊음이 필요하다. 사려깊은 마음으로 서로에게 계율을 지켜주도록 하여야 함을 저 제자가 오늘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박한영은 수련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참선은 큰 믿음과 큰 분노와 큰 의문이란 세 가지 요체로 되어있다." 서산대사의 지론을 잇고 있다. 불립문자는 경전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라고 그는 풀고, 치열하게 경전의 진짜 뜻을 읽어 문제의 중심으로 바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믿음, 분노, 의문을 요즘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경전에 어떤 문장이 씌어져 있다. 그러면 우선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야지!" 이게 큰 믿음이다. 그런데 실상은 저 문장과 다르다. "그렇지 않다고?" 마음을 기울여 그 '차이'를 풀어내야 한다. 그게 큰 분노이다. 그러려면 질문이 필요하다. "대체 왜 안 그런가?" 이것이 큰 의문이다.

"늙음을 허무하다 하는 것은 죽음도 삶도 깊이 모르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라. 한지에 먹물이 번지듯이 햇살이 창에 스며들듯이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것이다. 밝게 스며드는 죽음을 알게되면 늙는 것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다. 죽음을 알고나면 지혜롭게 사는 일만 오롯이 남아서 오히려 조용하고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고희가 된 박한영이 제자인 최남선에게 들려준 법문이다.

1933년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에 기념사를 할 때였다. 일제는 이날을 가장 큰 명절로 삼아 곳곳에서 성대한 행사를 갖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등 뒤엔 현수막이 늘어서있고 옆으로는 여러 가지 장식을 해놓은 강단에 박한영이 올라섰다. 일순 조용해진다.

"아아, 그란디...오늘이 바로..."
평소와는 다른 어법에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교장을 지켜보았다.
"일본 천황폐하 생일이래여. 그러니 잘들 쉬어. 응?"
10초나 됐을까. 너무 짧은 경축사에 청중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 박한영은 연단을 내려와버렸다.

이제 다시 미당에게로 돌아가자. 그는 스승을 기억하며 이런 시를 썼다.

석전스님더러
"금강산에 가 참선을 해보겠습니다"하니,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웃으시며
"금강산 구경이겠지? 다녀서 오게"하고,
그가 신던 편리화를 내게 물려주었다.
잠시 잠깐만 외면하시더니
"걸어서 가는 게 썩 좋겠구만"하고,
씨익 또 한 번을 웃으셨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1' 제1연 /서정주

미당은 금강산 마하연의 만공스님에게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석전이 편리화(운동화)를 선물하는 저 대목은 19세의 미당이 금강산 바람이 나서 나설 때의 일이다. 석전은 '만공에게 쓰는 당부편지'를 써서 제자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미당은 양주 망월사, 연천 심원사, 철원 도피안사, 금성 천불사를 거쳐 금강산에 이른다. 그러나 만공을 만나지는 못했다. 미당이 돌아왔을 때 스승은 빙긋이 웃고는 "내 뭐라던가?"라며 그를 맞아 옆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역사상 최악의 난세를 열정적으로 살았던 박한영은 1948년 정읍 내장사에서 79세로 입적했다. 그는 과연 '돌대가리'의 허허로운 욕설같은 화두 위에서 깨달음의 빛을 얻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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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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