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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마르코스의 '군터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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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 가린 파라과이 역사 바로 보기

파라과이에는 바다가 없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가 이 나라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에게 남미는 낯익지 않다. 남미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남미의 대표선수’처럼 느낀다. 축구, 삼바, 탱고…. 문학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아니라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콜롬비아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보르헤스는 스페인어로 시와 소설을 썼다. 조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루스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파울로 코엘류는 ‘연금술사’를 포르투갈어로 썼다. 거기서도 무라카미 하루키나 오르한 파묵을 읽을까.
“그래서 ‘군터의 거울’이 더욱 반갑다”라고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나는 파라과이 작가 후안 마누엘 마르코스를 모른다. (책에는 ‘마르꼬스’로 인쇄했지만 신문은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을 따른다) 거기다 번역이 가로막고 있다. 소설을 앞에 놓고 비로소 공부하기 시작한다.

표지를 보자. 하늘색 고양잇과 동물이 멀리 보이는 숲과 교회를 향해, 아니면 뒤표지에 있는 사람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교회 벽은 희고 십자가는 분홍색이다. 사람은 발만 보인다. 발 모양으로 보면 땅에 등을 대고 누워 있다. 송장일지 모른다. 고양잇과 동물은 재규어다.

그림은 과라니족의 전설을 담았다. 세상이 끝날 때에 거대한 하늘색 재규어가 나타나 인류를 먹어치운다는 이야기다. 불(火)과 하늘색 재규어가 세상을 파괴하고 과라니족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군터의 겨울에서 이 신화 모티프는 비전이다. 옛 질서의 파괴와 새 질서의 창조.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솔레닷은 열여덟 살, 가난한 집 딸이다. 변호사 집 막내딸 베로니카와 친구인데 베로니카의 오빠 알베르토와 사귄다. 어느 날 베로니카 남매의 부모와 남매의 후견인인 군인 구메르신도 라라인이 살해되었다. 솔레닷이 살인 혐의로 구속돼 모진 고문을 받는다.

세계은행 총재 군터는 솔레닷의 고모부로, 워싱턴에서 산다. 군터의 아내 엘리사가 군터에게 말한다. 파라과이로 가라고. 군터는 파라과이에서 군인과 정치인, 종교인 들을 만난다. 그러나 솔레닷은 죽는다. 군터는 총재직을 버리고 파라과이에 남는다.

이토록 무겁고 암울한 서사는 작가의 체험을 반영한다. 마르코스는 파라과이 군부의 독재에 항거한 작가이다. 박해를 피해 스페인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89년 파라과이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해 쿠데타가 터지자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파라과이로 돌아갔다.

소설의 무대는 아르헨티나의 도시 코리엔테스다. 파라과이가 코앞이다. 소설의 무대를 코리엔테스로 설정한 이유는 검열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설은 1987년 아순시온에서 출간됐다. 독재 정권이 서슬 퍼렇던 시절. 작가는 파라과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직설적으로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적 배경은 아르헨티나가 영국과 전쟁할 때다. 우리에게는 ‘포클랜드 전쟁’이다.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속한 곳이 정해진다. 포클랜드를 '말비나스'라고 부르는 소설이기에, 조금은 고통스럽게 읽어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 언론은 시위대 뒤가 아니라 진압 경찰 뒤에서 취재하는 데 익숙하다.

소설은 다채롭다. 아르튀르 랭보, 조지 오웰, 월트 휘트먼, 어니스트 헤밍웨이, 헨리크 입센, 장자크 루소를 인용한다. 역사적인 사건들은 은유나 상징으로 이용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파라과이의 과거, 잘 알려지지 않은 권력의 어두운 이야기를 통하여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려 한다.

표지가 모든 것을 말한다. 하늘색 재규어는 솔레닷이다. 소설은 그녀가 재규어로 변신했으리라고 암시한다.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대신 파라과이에 남는 군터의 선택은 작가의 실존적 의지와 세계관을 반영한다. 인간의 행동과 참여, 문학과 정치행위의 연대에 대한 믿음이 그곳에 있다. huhball@

<후안 마누엘 마르코스 지음/조구호 옮김/알렙/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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