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권성회 수습기자] 15일 저녁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찾은 낙산공원은 쉽게 반가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10분 남짓. 낙산공원까지 가는 길은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지도 않다. 시끌벅적한 대학로 골목골목을 누벼서 길을 찾아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고, 공원 입구까지 꽤 경사가 높은 언덕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습한 날씨 탓에 땀도 금방 맺혔다. 가는 길목마다 낙산공원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었다면 초행자 입장에선 길을 헤매기 쉬워 보였다.
서울 종로 동숭동 낙산공원은 도심 속 대표적인 야경 명소로 꼽힌다. 낙산은 조선시대 북악산, 남산, 인왕산과 함께 수도 한양을 이루는 내사산(內四山) 중의 하나로, 그 모습이 낙타 등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일제 시대 상당 부분 소실되고 급작스러운 도시화로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으나 자연환경과 역사적 문화환경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2002년 공원으로 조성됐다.
놀이광장에서는 낙산공원을 기준으로 동쪽과 북쪽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이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인데, 그 경계선에 서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돈암동, 정릉동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주변 주택가의 환히 켜 있는 불을 볼 수 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때엔 죽 늘어서 있는 북한산 자락을 볼 수 있는데, 주택과의 불빛과 대조를 이루는 게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낙산공원 가장 동쪽엔 복원된 서울성곽길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 가면 혜화문(동소문)을 거쳐 숙정문(북대문)까지 이어지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흥인지문(동대문)으로 갈 수 있다. 낙산공원 성곽길은 성 안쪽과 바깥쪽 모두 길이 나 있다. 특히 야간에는 불을 켜 놓는데, 성벽에 은은하게 비치는 불빛만으로도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성벽 바깥쪽 성곽길은 창신동, 삼선동으로도 이어진다.
다시 남쪽으로 가다가 공원 중간쯤에 있는 작은 정자 ‘낙산정’도 도심의 경치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다. 제2전망광장보다는 시야가 좁지만 대학로를 비롯한 도심의 밝은 빛을 더욱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정자에 가만히 앉아 풍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원한 바람이 그대로 밀려오면서 마음도 편해지는 것만 같다. 다른 광장과는 달리 산책길에 정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훨씬 조용하고 쾌적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낙산정 가는 길목엔 ‘홍덕이밭’으로 불리는 작은 텃밭이 있다. 이 밭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둘째아들이었던 봉림대군은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게 된다. 이때 홍덕이라는 나인이 대군을 모셨는데, 채소를 직접 가꿔 김치를 담가 대군에게 매일 드렸다고 한다.
8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한양에 돌아온 대군은 이후에도 홍덕의 김치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이에 대군은 낙산 중턱의 채소밭을 홍덕에게 하사해 채소를 가꾸고 김치를 담가 올리도록 했다. 대군은 왕위에 올라서도 홍덕의 김치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이 왕이 바로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다.
낙산공원을 뒤로 하고 나오니 마로니에 공원을 비롯한 대학로 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적한 공원을 벗어나 다시 맞이한 젊음의 거리는 다소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낙산공원이 야경의 명소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도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살아있는 자연의 공간이었다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만큼 낙산공원은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도심 속 휴식공간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옛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밤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도심의 풍경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은 낙산공원의 가장 큰 매력이다. 무덥고 지치기만 한 여름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늦은 저녁 낙산공원을 찾는 것은 어떨까. 공원 위에 올라서서 서울 시내를 쭉 내려다보면 답답했던 가슴이 ‘뻥’하고 뚫릴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권성회 수습기자 stree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