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의 현기증과 눈감은 자아의 황홀한 순간에 대한 예찬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결코 자화상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그림의 소재로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내 관심을 끕니다. 나는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특이한 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회화로든 글로든 나의 자화상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 내 그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서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면 될 겁니다."
여인의 얼굴은 클림트의 이 말을 자꾸 떠오르게 한다. 눈을 감고 있는 저 표정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연이 있다.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 사람을 보았지만, 저렇게 영혼의 눈을 뜬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노라면, 클림트의 갈망이 떠오르고, 그가 다다른 신성에 가까운 평화와 만족이 느껴진다. 키스란, 얼마나 따뜻한 자애(自愛)인지 저 여인은 그 표정으로 다 보여준다.
클림트가 저런 얼굴을 모델로 선택한 건 우연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의 매력은 남녀가 걸치고 있는 의상의 무늬를 활용한 '명품'스런 장식이다. 그녀의 얼굴은 클림트의 그림이 지닌 화려하고 행복한 장식성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녀의 얼굴 자체가 장식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장식이 지닌 단조로움의 내재율, 그러나 그것이 서서히 고양시키는 미묘한 정서적 흥취. 게다가 뭔가 텅빈 것 같은 것의 불안한 아름다움, 바로 그 허영끼까지. 내가 알고 있는 여자의 이미지 명세서는, 그래서 클림트의 저 여자와 분리하기 어렵다.
천경자의 그림이, 장식성이 강하다고 말하지만, 클림트의 이 그림에 비하면 그건 양반이라 할 만하다. 이 그림은 널찍한 거실에 걸어놓고 바라보면 좋을 것이다. 인간을 매혹시키는 꿈의 무늬들이 카펫처럼 깔린, 그 그림에선, 키스도 하나의 파격적인 장식일 뿐이다. 남자가 고개를 굽힌 각도 만큼 고개를 젖힌 여자. 키스는 저 조응(照應)하는 각도의 아름다움이다. 어쩌면 저 함께 꺾은 각도의 긴장이, 황금빛 옷과 황금빛 허공 속 온갖 무늬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키스는 입술 부근의 문제 만은 아니다. 클림트는 키스를 통해, 인간의 생에서 가장 자기의 환희와 본능에 충실한 아름다운 한 때를 표현해낸 것인지 모른다. '키스데이'라는 날이 만들어진 것은, 클림트의 화의(畵意)와 같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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