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뒷談]'힘없는 중앙銀' 돈 빼 쓰는 정부?
120년 전 풍자만화로 보는 중앙은행 외압논란
길레이 英 풍자만화가 '힘의 불균형' 세세히 묘사
세계적 경기후퇴·디플레 우려로 돈 풀기 압박 여전
외압이냐 공조냐…한은·기재부도 끝없는 논란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늙은 여자가 황금 상자에 앉아 있다. 상자엔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이란 글씨가 써 있다. 좌물쇠도 두개나 채워져 있다.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남자가 입을 삐죽 내밀며 키스하는 척 하지만 능청스럽게도 손은 여자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여자는 뭐라 외치고 있지만 이미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이 줄줄 떨어지고 있다. 남자의 발치에는 '대부증(Loans)'이 휴지조각처럼 나뒹군다. 여자는 기겁해 입으로는 저항을 하지만 힘에 부친다. 여차하면 치마 뒤로 감추고 있는 금고까지 몽땅 빼앗길 태세다.
◆영란은행과 재무부 풍자만화 속 '힘의 불균형'
위 그림은 제임스 길레이(1757~1815년)가 1797년 그린 풍자만화다. 제목은 '위기에 빠진 영란은행'. 그림에서 남자는 당시 영국 수상인 윌리엄 피트, 여자는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 BOE)을 상징한다. 영란은행은 1694년 세계최초로 설립된 중앙은행이다. 당대 정치풍자로 이름을 떨쳤던 제임스 길레이는 영란은행과 재무부간 힘의 불균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금고의 주인은 중앙은행이지만 정부가 와서 돈을 풀라고 하면 빼앗길 수 밖에 없다. 길레이는 중앙은행이 금고를 여닫는 주인이지만 사실상 주인일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그림 속 배경을 좀더 들여다보자. 나폴레옹과의 격전을 위해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영란은행에 대출을 요구했고, 이를 쉽게 하기 위해 금태환법도 폐기했다. 금태환(金兌煥)이란 금본위제도 하에서 중앙은행이 화폐를 금으로 바꿔주는 것을 말한다. 금태환이 폐기되면 금이 없어도 중앙은행이 돈을 찍게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선 당연한 방식(금태환 폐지)의 화폐발권이지만 당시만 해도 충격적이었고 경제에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란 우려가 컸다. 실제로 중앙은행이 무지막지하게 정부에 대출을 해줘 버블이 커졌고 경제는 혼탁해졌다. 중앙은행이 정부 압박에 맞서 독립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생긴 참극이란 여론이 우세했다. 이 그림을 '숫자없는 경제학'에 수록한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은 "국민의 눈으로 보자면 금태환 중단은 영란은행이 정부의 시녀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평했다.
120년이 지났지만 당시 제임스길레이의 풍자만화에서 묘사한 중앙은행과 정부의 '힘의 불균형', 혹은 '수세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당시엔 전쟁비용을 마련할 목적으로 중앙은행을 압박했다면 지금 각국의 정부는 세계적인 경기후퇴와 디플레이션 우려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은행에 돈을 풀라고 압박한다. 설사 중앙은행이 금융통화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금고를 열고 돈을 풀어줘도 '어물쩡하다 백기투항한것 아니냐', '외압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관성적으로 따라붙는다.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의 외압논란
우리나라의 중앙은행과 기획재정부의 관계도 비슷하다. 올해 1월 나온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비망록에 한 대목을 보자.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 이성태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나라가 다 내릴 때 올렸고 금리 격차도 너무 심하니 1% 내리면 좋겠다고 권고했더니 그는 관례대로 0.25%를 내리겠다고 했다. 지금 상황이 위중하니 1%를 꼭 내렸으면 한다고 말했지만 금리는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한다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중략) 강하게 1%를 요구했더니 0.5%까지는 생각해보겠지만 더 이상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었다. 언쟁을 할 수도 없어 '내 판단대로 하는 것이 좋을거요'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강만수,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 358~359쪽)
책에 따르면 강 전 장관의 이 발언 직후인 2008년 10월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0.75% 떨어트렸다. 강 전 장관은 이로인해 금융시장의 경색을 덜게 됐다고 평가했다. 같은해 10월 미국이 금리를 1.00%로 내렸고 일본, 영국, 중국도 이어서 금리를 내렸다는 것. 강 전 장관은 "금리를 연말에 3.00%까지 허겁지겁 내렸으니 중앙은행의 독립보다 고립이었고 선제적 결정적 충분한 조치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고 평가했다. 후일 이런 강 전 장관의 진술은 논란이 돼 이성태 총재와 설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가 시켰더니 한은이 내렸다"는 발언은 강 전 장관만의 얘기는 아니다. 지난 12일 한은은 기준금리를 종전 연 2.00%에서 사상 최저인 1.75%로 내렸다. 여느때처럼 전방위 금리인하 압박에 굴복한 것 아니냐, 물밑접촉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실제로 금통위를 하루 앞둔 지난 11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전 세계적인 통화완화 흐름 속에 한국 경제만 거꾸로 갈 수는 없다"면서 금리인하를 종용했다. 여기에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지켜지고 있는지 양상을 보면 심히 걱정스럽다"면서 "절차상으로 볼 때 여당 대표가 금리인하를 말하자마자 한국은행이 깜짝 결정을 한 것"이라며 외압설을 제기했다.
한은은 항변한다. 이제는 '파티 브레이커' 혹은 '인플레 파이터'보다 '디플레 파이터'가 되어야 하는 중앙은행이 정부와 정책 공조를 할 때마다 근거없이 "사전 접촉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윤창현 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적이 바뀌었으면 전투복도 새로 입고 전투화도 갈아신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정부와 반대편에 서면 멋있어 보이고, 정부와 정책공조를 하면 굴복하는 프레임으로 한은을 봐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한 금통위원은 "시장 발언을 참고는 하지만 매일 사설에서 금리 내려라 할때나 소수의견이 나왔으니 다음달엔 내릴거란 추측성 기사를 볼때 힘이 든다"고 토로했다. 한국은행 고위관계자도 "물밑접촉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매번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제임스 길레이의 그림 '위기에 빠진 영란은행은'은 18세기(1797년) 나온 풍자만화다. 200여년이나 지났다. 늙고 힘없는 여자(중앙은행)가 젊은 백작(정부)에게 강탈당하는 듯한 오래된 공식으로 중앙은행을 바라보는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을까.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