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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미루지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이유

최종수정 2014.11.11 11:15 기사입력 2014.11.1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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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매년 8월 말 내 전공분야 최대 규모의 학회가 미국에서 열리는데 늘 같이 호텔 방을 쓰는 룸메이트 여교수가 있다. 보통 하루 호텔 방값이 30만원 정도하는데 학회 참가자들에게 반값 할인을 해주어도 학생 입장에서는 며칠을 지내려면 부담이 되는 액수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은 주로 학회 웹페이지에서 참가자들을 검색해 룸메이트를 구한다. 나도 이 여교수를 대학원생 시절 처음 만났다. 지금은 미국 서부 작은 사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데 수많은 '김'씨 한국 학생 중 어떻게 나를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우연한 선택으로 거의 십년 동안 그 학회를 갈 때마다 방을 같이 쓰고 있다.

처음 같이 방을 쓴 해는 둘 모두 박사논문 자격시험을 치르기 직전이었다. 침대에 누워 자격시험을 앞둔 긴장과 걱정을 한참 얘기하다 둘 다 '이 시험만 끝나봐라, 그 때는 정말 시험 걱정 없이 제대로 된 논문 연구를 해야지'하며 잠들었다. 둘 다 시험을 통과하고 논문 연구를 거의 마치고 졸업할 무렵이 되었다. 다시 학회에서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는 마침 둘 다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같이 침대에 누워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사회과학분야에서 테뉴어 트랙 교수직 구하는 온갖 어려움에 대해 한창 떠들다가 둘 다 '직장만 구해봐라, 그 때는 구직 걱정 없이 제대로 된 연구를 해야지' 하면서 잠들었다.

다행히 둘 다 조교수로 채용되어 나는 플로리다에서 그 교수는 캘리포니아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연구하던 중에 3년차 리뷰에 들어가는 해가 되었다. 미국에서 보통 테뉴어는 채용 후 5~6년째 심사하지만 그 전에 3년차 리뷰라고 하여 중간 점검 차원의 심사가 한 번 더 있다. 다시 방을 같이 쓰게 된 우리는 백인들이 유독 많은 학과에서 유색인종에다 외국인인 한국인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어려움, 다른 동료 교수들과의 미묘한 갈등 얘기를 한참 하다가 둘 다 '3년차 리뷰만 끝나봐라, 그 때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해서 테뉴어를 받아야지' 하며 잠들었다.

그러다 나는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고, 예전처럼 매년 그 학회에 가지 못해 그 룸메이트 교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올해 간만에 그 학회에 가게 되었다. 그 사이 그 교수는 제법 유명한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 엔지니어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휴직한 후 막 복귀한 상태였다. 둘 다 올해 테뉴어 심사를 앞두고 있어서 이번에는 한국과 미국의 테뉴어 제도에 대한 온갖 성토(?)와 심사 걱정을 하다가 둘 다 '테뉴어만 받아봐라, 그 때는 쥐어짜는 논문 수가 아니고 제대로 된 연구를 해서 정말 훌륭한 논문을 써야지' 하면서 잠들었다.

뒤돌아보니 시험, 심사, 구직, 승진 등 여러 고비 때마다 얼마나 미룬 게 많았으면 그것만 지나봐라 하며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나 싶다.(룸메이트 교수는 결혼을 한참 미루다가 세 번째 고비가 넘어서 한 셈이니)늘 그 고비만 넘기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고비를 넘기면 더 높은 고비가 있었다. 그래서 요새는 고비만 넘겨 봐라가 아니라 '고비를 넘기면 하겠다'는 일을 그냥 지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넘겨온 고비였으니 지금 그런 연구를 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 신임 교수 워크숍에서 선배 교수가 이렇게 얘기했다. '저희 때는 연구비를 따내려고 논문 쓰고,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했는데, 여러분은 연구하다 보면 논문이 나오고 논문을 쓰다 보면 연구비가 나오는 그런 시대에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연구비 경쟁도 만만치 않은 요즘 어쩌면 너무 순진하게 들리지만 문득 그런 시대가 올 때까지 연구자들은 무엇을 얼마나 미루어야 하는지, 또 정말 미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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