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인품과 지략으로 황제를 보좌할 재목으로 인정받았다. 남양 지방의 명사 하옹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왕좌를 보좌할 재능이 있다"며 극찬한 바 있다. 그는 189년 효렴(孝廉)에 추천되었고 실력자 원소에게 출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평범한 소인배임을 인지하고 191년 조조의 신하로 들어갔다. 조조와 순욱의 이십여년간의 깊은 군신관계가 시작되었다.
순욱의 대국을 보는 안목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맞이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196년 황제는 내란으로 황폐해진 낙양으로 돌아왔고 원소와 조조 양 진영에서는 황제를 자기 진영으로 모시려는 논의가 분분했다. 원소 진영은 더 이상 후한 황실의 부흥은 기대하기 어렵고 천자를 모시면 일일이 상주해야 하므로 오히려 행동을 속박당하게 된다고 생각해 황제 봉대를 거절하였다.
순욱은 "주상을 받들어 백성의 소망에 따르는 것이 커다란 순리이며, 공정한 태도로 각자의 호족과 영웅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스스로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대략이다. 만약 이 기회에 행동하지 않고 천하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버린 다음이 되어서는 이미 늦다"며 황제 옹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조조의 황제 봉대는 조조에게 황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을 주었다.
조조는 순욱의 오랜 공로를 인정하여 만세정후에 봉하였고 딸을 순욱의 장남 순운에게 출가시켰다. 그러나 조조가 권력을 강화하려 하자 양자 사이에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212년 조조의 측근 동소 등은 조조의 작위를 국공으로 높이고 공신으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하자고 순욱에게 제안했다. 그는 "조조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조정을 구하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다. 군자가 사람을 위하는 것은 사직을 따른 것이지 이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며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후 둘 사이는 더욱 소원해졌다. 조조는 순욱의 충성심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직을 위한 것임을 알고 크게 낙담한다. 결국 둘은 끝까지 같이 갈 수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죽음을 택한다.
사마의는 "나는 백수십 년에 걸쳐서 순욱에 버금가는 현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동시대 문인인 예형은 "그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어딘가 숙연함이 느껴지는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순욱의 보좌가 있었기에 조조가 삼국시대의 최대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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