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책이 강동지방의 실력자로 부상함에 따라 그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손책이 양주 북부의 명가 교현의 큰딸 이교와, 주유가 작은딸 소교와 혼인함에 따라 둘은 동서지간이 되었다. 두 자매는 강동의 이교로 불리는 절세의 미녀였다. 200년 손책이 급사하자 강동의 벽안아(碧眼兒)로 불리는 동생 손권이 그 뒤를 이었다. 208년 위의 조조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형주의 유종을 굴복시키고 장강을 건너 강동지방을 통일하려 하였다. 바야흐로 적벽대전의 서곡이 열린 것이다. 손권은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의 남하를 막을 것인지 아니면 투항할 것인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촉의 제갈량은 오나라로 건너가 참전의 불가피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제갈량은 손권에게 "젊은 당신이 한 번도 싸워보지도 않은 채 호락호락 조조에게 항복한다면 부끄럽지도 않단 말씀입니까"라며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항전을 결심한 손권은 주유를 불러 그의 최종 의견을 들었다. 주유는 "북방의 건조한 땅에서 원정을 온 조조의 군사들은 남방의 습기 많은 기후와 풍토에 익숙하지 못하여 전염병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오랜 전투에서 오는 피로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조조를 이기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반드시 군대를 격파하겠습니다"라며 주전군을 개진했다. 손권이 주전론을 채택하면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시작되었다.
적벽의 싸움은 제갈량의 연환계, 황조의 모략, 연합군의 화공전에 말려 위나라의 대패로 끝났다. 전후 처리 문제가 오와 촉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오나라에는 친유비 세력과 반유비 세력이 대립하였고 노숙은 대표적인 친유비파였다. 유비는 형주의 4군을 일시적으로 할양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주유는 일찍이 유비와 제갈량의 야심을 꿰뚫어 보았다. 유비는 오나라에 가장 큰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손권은 그의 건의에 따라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유비와의 동맹을 강화하려 하였다. 전형적인 정략결혼인 셈이다. 주유는 대촉 강경론을 주창하였고 사사건건 유비 세력의 확장을 견제하였다.
그는 자신의 후임으로 노숙을 천거하였다. 이후 217년 노숙이 사망할 때까지 오나라는 비교적 친유비 외교노선을 견지한다. 촉나라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손권은 주유 사망 소식을 듣고 "나는 제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를 잃었다. 앞으로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라고 깊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주유가 좀 더 장수했다면 삼국시대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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