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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17. '트로이', 무자비함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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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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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사람은, 재미있는 화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말한다. 이것은 좋다. 이것은 싫다. 이것은 좋지 않고 저것은 싫지 않다. 좋음과 싫음, 그 두 가지의 저울로 세상의 대부분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세상은 명쾌한 두 표정으로 갈라진다.

혹시 그가 이 글을 본다면 오해하지 말기를. 나는 그 강력한 저울의 성능을 의심한다거나, 다른 저울을 왜 쓰지 않느냐고 제언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니까.
호불호의 황금저울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뛰어난 감성을 가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좋아함과 싫어함이라는 감성적 관여도로 재편되어, 대상과 인간 사이에 아름다운 긴장이 깃든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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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 낭만주의적 관점을 즐긴다. 헥토르가 좋다. 용감하고 형제애 지극하고 마누라 사랑도 따봉 아닌가. 아킬레스가 좋다. 멋있잖아. 브래드 피트. 싸움도 잘 하고...파리스같은 남자는 질색이야. 자기 때문에 전쟁 났는데, 그게 뭐야? 어쨌든 사랑 때문에 목숨 건 건 멋있긴 했어. 아가멤논은 정말 나쁜 놈이지. 세속적인 욕망 밖에 없는 자이지. 거기다가 야비하잖아. 이런 얘기들은 유쾌하다. 영화 속에서 저마다 인격의 질감을 느끼면서, 나와 일정한 관계를 맺는 작업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약간 딴 소리를 해야겠다. 이를 테면 전쟁이 왜 영화에 등장하느냐는 질문 따위로 시작해보자. 영화 속의 전쟁은 인간의 죽음을 집체적인 마스게임으로 표현한다. 즉 '고통'의 장관(壯觀)을 서비스한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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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죽음과 떼고통은 인간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는가. 절멸의 공포 근처에, 말할 수 없는 처연한 쾌감이 서성거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는 안전하게 이 쾌감만을 제공하는 장기를 지니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무자비의 미학'이 아닐까 한다. 전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자비'이지만, 영화 속 전쟁은 그 중에서 감당할 수 있는 '무자비'들만 잘 발라내 관객에게 내민다. 잘 발라냈다고 해서, 무자비가 무자비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약간의 '자비'를 섞는 점에 유의하라.

헥토르가 그야 말로 실수로, 아킬레스의 사촌을 죽였을 때, 아킬레스는 격분한다. 이 무적의 영웅은 트로이성으로 혈혈단신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성 앞에서 헥토르를 부른다. 헥토르! 헥토르! 헥토르! 전투의 실력은 이미 판가름 나있다. 성 밖으로 나가면 헥토르는 아킬레스에게 죽게 돼 있다. 그런데도 헥토르는 투구를 입고 아킬레스와 싸우러 나간다. 왜 그랬을까.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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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영화에선 유난히 영웅이란 말을 강조한다. 영웅은 바로 전쟁이 만들어낸 독특한 개념이다. 인간은 전쟁이 '원칙이 있는 싸움'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에 심어왔다. 영웅이란 호칭은 단순히 승자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바로 원칙을 준수하는 용기를 지닌 자에게 씌워준 월계관이다. 헥토르는 그 전쟁원칙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한 '영웅'의 길을 걸은 사람이다.

아킬레스가 당당히 맞선 헥토르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 그를 살려줬다면 어땠을까. 일부 독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킬레스를 멋지게 봤을 지 모르지만, 영화는 신파(新波)로 전락했을 것이다.

착하고 정의로운 헥토르의 심장에 잔혹하게 칼을 꽂고, 그의 주검을 수레에 묶어 가차없이 끌고가는 아킬레스의 '무자비'는, 온기를 허용하지 않는 전쟁의 기율(紀律)을 느끼게 한다.

청마 유치환이 그의 시 '수(首)'에서 읊었던 '비정(非情)' 바로 그것이다. 문제가 삶과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그 원칙을 지키는 명예에 있음을 증거하는, 무자비의 미학.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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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는 이 차가운 정신을 관철하는 가운데 한 가닥 온기를 불어넣는다. 헥토르의 아버지가 아킬레스를 찾아와 간청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 그는 아킬레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소. 훌륭한 분이었지."

이 호소가 먹혀든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주검을 내주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전쟁을 중단하겠다고까지 약속한다. 이 '파격'은 전사 아킬레스가 아니라 인간 아킬레스를 감동적으로 돋을새긴다.

전쟁의 냉엄에 끼어든 '인간의 온기'. 영화가 자주 전쟁을 써먹는 이유는, 바로 저 실낱같은 온기가 자아내는 놀라운 감동의 약발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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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영웅의 '온도'를 조절하는 실불이다.

왕자 파리스와 함께 도망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는 살육의 '전쟁'전체를 낭만적으로 싸안는다 .

아킬레스의 연인이 된 트로이의 여사제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스의 따뜻한 내면을 살짝 드러나게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고 아킬레스의 어머니는 굳세고 감성적인 모성을 잠깐 내비침으로써 이 영웅의 고결한 태생을 암시한다.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 또한 도무지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이 불행한 영웅의 내면을 데우는 난로이다.

'트로이'가 장대한 스케일 자랑에 그치지 않고, 또 소란 통의 연애질 중계에 머물지 않았던 건, 온기를 아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저 여성적 체온을 함부로 쓰지 않았고, 또 사내들로 하여금 쉽사리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헤프지 않은 온기가 이 영화를 묵직하고 강렬한 통증처럼 기억에 남게 한다. 일견 곱상해서 귀여워 보이기만 했던 저 브래드 피트가, 사자처럼 '헥토르! 헥토르! 헥토르!'를 내뱉는 소리가 귀울림으로 아직 떨린다. 이 장면 하나로도, 영화 '트로이'는 참혹하게 아름답다. 무자비한 전쟁이 낳은 한 가닥 시(詩)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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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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