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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13. 영화 ‘군도’와 강동원현상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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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에 탄생한 큼직한 영화, ‘명량’과 ‘군도’는 비슷한 길을 걸어갔고 다른 방식으로 걸어갔다. 둘 다 100억대 이상의 제작비를 들인 야심작이었고 흥행을 일궈냈다. 물론 차이는 있다. 연일 관객대첩의 신기록을 세우며 달리는 ‘명량’의 상영관은 봇물을 이루고 있었지만 ‘군도’는 상영하고 있는 곳이 상대적으로 적어 관람시간대를 더 고민해야 했다. 배급사의 실력(CJ와 쇼박스)차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스토리에서 그 차이를 찾아본다.

지난 4월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을 단군이래 가장 참담한 초상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아직 실종자 10명을 남긴 채 표류중이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파장 또한 진행형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들은 극장을 들락거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에, 영화들은 저 상중(喪中)의 민심에 대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름에 접어들면서, 슬픔에 지친 민심이 오히려 영화로 위안을 받고자 하는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름방학 장사에 승부를 걸어야했던 대작(大作)들은 이런 변화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명량’은 이순신의 영화이고 ‘군도’는 민초(民草)들의 스토리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리더의 결단과 충정을 다룬 이순신은, 큰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국가무능에 접하며 좌절했던 세월호민심을 사로잡고 있다. 대통령이 기꺼이 이 영화를 보러간 까닭은, 영웅적인 리더십의 아우라를 얻고싶은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는 ‘군도’를 보러가진 않았다. 이 영화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를 뒤엎는, 보다 과격한 민심을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 아닐까. ‘명량’은 어쨌든 또 하나의 위인전이지만, ‘군도’에는 백성을 궐기시키는 증오의 확장이 들어있다. 우연일까, ‘명량’과 ‘군도’의 흥행싸움은 얼마전 재보선의 여당과 야당의 승부 결과와 닮아있다. ‘민생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자’는 명량식 새누리와 ‘세월호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군도식 새정치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억해보라.


‘군도’는 1862년 2월18일에 일어난 진주민란을 시대적 배경(진주민란으로 시작된 임술년 봉기는 71개의 난에 이른다)으로 삼는다. 영화의 지역적 무대를 나주로 택한 것은, 이 민란이 남도 일대를 휩쓸며 번져나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주평야가 있는 곳이라 웨스턴의 활극을 꾸미기에도 좋았을 것이고, 호남사투리의 재미를 불어넣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창원과 거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강동원이 뚜렷하게 쓰는 경남사투리 억양이 좀 튀었다. 나주 토호의 아들이 갑자기 자갈치사투리를 쓰며 분위기를 잡으니 좀 깬다. 본인도 이 얄궂은 상황을 튀지않게 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워진다.

진주는 역사상 두 번의 큰 민란을 겪은 도시다. 1200년 고려 때 진주의 노비들이 향리의 수탈에 항의하여 난을 일으켰다.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향리 정방의가 활을 차고 관청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반란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정방의의 아우 정창대가 난을 일으킨다. 이 향리의 난을 진압한 것은 민초들이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1862년에 일어난 민란은 지방관리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경상도 우병사였던 백낙신은 농민들의 곡식 5만냥 어치를 수탈했다. 이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격문을 붙이고 장터를 휩쓸었다. 이들을 나무꾼군대(樵軍)라 불렀다. 이들은 민란지도자 유계춘이 직접 지은 초군가를 부르면서 진주성으로 몰려가 탐관오리 백낙신에게서 환곡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약속문서를 받아낸다. 그런데 흥분한 민심은 이에 그치지 않고 관리들을 불태워 죽이고 지탄을 받는 부자들을 습격 살해하고 재물 10만냥을 빼앗는다. 이 난은 석달만에 진주안핵사로 새로 임명된 박규수에 의해 진압되는데, 농민 10명이 효수당하고 20명이 귀양을 간다. 이 역사적 사건이 영화의 골격이 되었다. ‘군도’는 나름 뼈대있는 영화가 되고 싶었던지, 나래이션으로 구체적인 연도와 사건을 거명하며 다큐적 분위기를 가미하려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리산 추설’은 조선 후기 때 생겨나 일제 강점기까지 존재했던 도둑들의 본거지이다. 옛말에 남에는 추설, 북(황해도 혹은 강원도)에는 목단설이란 말이 있었다. 추설과 목단설을 대개 의적들을 가리킨다. 도둑떼 중에는 북대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들은 최하층 비렁뱅이들이 모인 파렴치범들 무리였다. 추설과 목단설에 대한 얘기는 뜻밖에 백범일지에 나온다. 김구가 국내 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 김진사라는 사람들이 옥에 들어왔다. 김진사는 활빈당 두목이었다. 그가 대뜸 김구더러 물었다.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는데 도대체 어느 계통이오? 추설이오, 목단설이오. 아니면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김구는 김진사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해 어안이 벙벙했다. 나중에야 그의 그런 말들이 의적들의 용어라는 걸 알게 됐다. 목단설과 추설의 뒤에 붙는 ‘설’은 ‘서리(도둑질)’의 준말이다. 그러니까 목단서리, 추서리란 얘기다. 목단서리는 목단이 피는 봄날 한탕을 해서 1년을 버티고 산다는 뜻이고, 추서리는 가을에 한탕을 해서 먹고 산다는 의미다. 범죄는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그들의 면모가 이름에도 숨어있다. 영화에는 대호(이성민 역)가 노사장으로 나오는데, 이 노사장은 의적의 수령(首領)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무는 유사라고 불렀다. 부하들을 모으는 일을 ‘장을 부른다’고 했다.

‘범죄와의 전쟁’의 감독 윤종빈은, 이 영화를 고리타분한 옛이야기의 발굴로 채우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독특한 캐릭터의 악당을 창조하고 싶었고 군도의 집단 속에서 개성적 인물들이 좌충우돌하며 자아내는 아기자기한 재미들을 새겨넣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적 제약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동서고금의 역사와 스토리들을 섭렵한 관객이 살짝 퓨전감각으로 즐길 수 있도록 웨스턴 음악도 깔고 조폭의 분위기도 냈으며 중국의 마적(馬賊)같은 이미지와 무협의 죽림결투도 새겨넣었다. 그는 민란이란 소재를 다뤘지만, 지도층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정면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적단을 스토리의 중심에 놓았지만, 개인적인 원한을 지닌 도치(하정우 역)의 ‘복수’가 슬쩍 발을 담그고 있으며, 선악의 대결 구도로 만들어놓고 있지만, 또다른 ‘사회의 피해자’이기도 한 서얼 출신의 악당(조윤, 강동원 역)을 배치함으로써 스토리를 단순하지 않게 얽어놓았다. 그는 민란의 사회적 의미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니라, ‘19세기 도둑떼’라는 스토리 소재를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관심을 둔 듯 하다. 이 영화를 ‘조선서부극’이라고 부르는 건, 그런 의미에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도치의 ‘벗겨진 바지’ 모티프와, 추설이 군도의 멤버가 되는 조건으로 내세운 ‘출중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의 연결은, 어쩌면 영화가 야심차게 깔아놓은 최고의 외설적 유머였을지도 모른다. 객석에서야 썰렁했을망정. 이 가벼움은 모던한 관객의 부담을 덜려는 감독의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군도’가 상영되면서 같은 이름의 웹툰을 동반흥행시키고자 하는 것 또한 타겟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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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강동원(1981년생)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자. 그는 2012년까지 서울보건환경연구원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다. 2010년 11월에 개봉한 ‘초능력자’가 입대전 출연한 마지막 작품이다. 그리고 4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군대를 ‘필’한 34세의 강동원이 사실상 처음으로 관객과 만나는 일생일대의 자리다. 대역을 거부하며 거친 무술신을 거의 스스로 소화했다는 뒷얘기는 이 영화에 대한 그의 승부욕을 짐작케 한다. 영화를 본 여성 관객들은 그의 아름다운 카리스마에 넋을 잃는다.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말했지만, 그녀들은 꽃같은 악당의 팽팽한 존재감에 매료된다. 오직 강동원만 보고 또 보았다는 여성관객과, 강동원밖에 안보이더라고 툴툴대는 그녀의 동행자 남자의 반응들은 같은 것이 다른 방식으로 읽히는 동상이몽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것은 오직 강동원의 피부와 얼굴선 때문일까, 스토리 때문일까, 감독이 의도한 영화적 센스일까.

군도를 제압하는 강동원의 예쁨이야 말로, 이 영화가 뿜어내는 인상적인 에너지이다. 우리는 선은 좋고 악은 나쁘다는 도덕적 준거의 틀을 상식으로 삼아왔기에, 좋은 선은 예쁘고 나쁜 악은 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악이 얼마나 고상하고 얼마나 우아하며 유혹적인지 번번이 깨닫게 된다. 핍박받고 고통받다 못 참고 도둑이 되고 강도가 되는 민초들은 얼마나 거칠고 못생겼으며 우스꽝스러운가. 군도는 그걸 세심하게 보여준다. 백성들의 옷 색깔은 박수근의 작품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삼베와 무명을 이용해 질그릇의 빛깔과 갈필 수묵화의 토속적 빛깔을 몸에 걸치게 했다. 민초나 군도나 할 것 없이 그들의 얼굴은 서로 분간하기도 어려울 만큼 더럽고 못생겼고 거무튀튀하다. 다만 동학혁명군이 달았다는 검은 저고리 동정으로 분노의 결집을 상징하고 있을 뿐이다. 말군(襪裙, 치마 위에 입는 바지)을 입은 여도적 마향(윤지혜 역) 또한 얼굴은 수더분하여 누런 무리 속에 그대로 묻혀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지지하고 지켜내야 하는 선(善)의 실상이며 정체이다. 하지만 철닉(무인의 공식복장)을 입은 무관들의 복장은 삼엄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악당 조윤이 춤을 추듯 칼을 휘두르며 휘날리는 도포자락은, 영조임금의 도포를 고증하여 만든 ‘조선명품’이다. 영조보다 키가 큰 강동원(185cm)에 맞춰 특별제작했다고 한다. 조윤의 갓 또한 일반 사극에서 쓰는 50cm가 아니라 영조임금이 쓰던 크기인 65cm의 광폭 갓이다. 청묵으로 그린 수묵화를 연상케하는 시원하고 정갈한 색조의 조윤이 그 깎아지른 듯한 조각얼굴로 냉소를 흘리며 검술실력이 형편없는 누우렇게 뜬 민초들을 베어넘기는 그 악의 춤은, 형언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릴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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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백정 돌무치로 불렸던 저 밑바닥 도치가 그렇게 벼르고 준비해서 덤볐는데도, 한치의 빈틈을 내주지 않는 조윤의 완전무결한 검술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는 현실세상의 구조를 엄혹하게 증언한다. 민란, 반란, 혁명, 쿠데타는 불량한 개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려는 떼거리전법이며 기습전략이 아닌가. 윤종빈감독은 강동원을 무적의 악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가 지닌 여성성을 세심하게 활용했다. 상투가 풀린 강동원의 ‘처녀귀신’ 무협지는, 로봇같은 사내들의 활극을 꽃잎 흩날리는 몽환의 비창(悲愴)으로 고양시켜놓는다.

이보다 더한 것은, 악당의 내면구조를 적출하는 윤감독의 스토리텔링 솜씨이다. 조윤의 아버지 조원숙(송영창 역)은 풍양조씨로 되어 있다. 나주의 토호 중에 풍양조씨가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아직 못 찾아냈다. 감독의 복안에는, 헌종 철종 대에 안동김씨와 더불어 세도의 중심이던 풍양조씨를 빌어, 조원숙을 당시 ‘권력’의 상징으로 삼고싶었을 것이다. 화류계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얼자였던 조윤은 정실의 배다른 남동생을 죽이려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 조원숙에게서 집안의 중요한 존재로 인정을 받기 위해 생의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러나 그의 사악함을 들여다본 아버지는 그럴수록 조윤을 경멸하고 멀리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 된 근원적 모순감이 그를 어떤 자비도 없는 악인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악(惡)이란 한자를 뜯어보면 두 번째 마음(亞心)이란 뜻을 품고 있다. 그에게도 첫 번째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구조와 생의 환경이 그를 그 자리에 두지 않았다면, 조윤도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가 두치와의 결투에서 죽게되는 것은 품에 안은 조카아이의 울음에 눈길이 머물렀을 때이다. 그가 그토록 죽이고자 했던 조원숙의 정실혈육에 대해 느낀, 깊고 본질적인 인간연민이 문득 그에게 ‘첫 번째 마음’을 아주 잠깐 돌려주었다. 냉혈한의 그 한 가닥 방심. 그것이 그의 악과 생을 동시에 끝장내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조윤의 콤플렉스와 왜곡된 자아는, 아름다움과 최고의 무예로 포장된 그 속에서 악의 질료로 기능하고 있었다. 우린 이 악당을 미워하고 저주하면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돌이켜볼 때 우리 마음 속의 악들도 거기에서 자라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군도는 후련한 영화도 아니고 스토리가 미끈한 작품도 아니다. 활극에서 독보적인 것도 아니고 권선징악으로 뿌듯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고 어둡지만 어둡지 않고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다. ‘흩어지면 백성, 뭉치면 도적’이라는 말이,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사회적 담론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성장과, ‘암흑 속에 피어난 벚꽃은 하늘의 뜻인가, 벚꽃의 의지인가’를 묻는 조윤의 처연한 자아성찰 속에, 담담히 빠져나올 수 없는 뒷맛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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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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