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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2. 영화 ‘신의 한수’- 진짜 신의 한수는 동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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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뉴스를 평가하여 배치하고 그 헤드라인을 다는 일을 주업(主業)으로 살아온 나는, 평생 ‘신의 한수’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절묘한 한 수가 나와, 인류의 수준을 일거에 업그레이드하는 꿈. 사람들이 무릎을 툭 꺾고 주저앉고 싶게 만드는 한 줄의 제목, 한 시대의 이마를 툭 치고 지나가며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벼랑에 서서 역사를 뒤바꾸는 삼엄한 한 칼. 그 한 수를 꿈에서도 그리워해왔다.

영화 '신의 한수'의 한 장면.

영화 '신의 한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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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구감독의 영화 ‘신의 한수’는 아마도 편집기자들이 자주 제목으로 쓰며 자신의 희원(希願)을 드러내는 그 표현에 바친 헌정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척이나 되는 장대끝같은 벼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정신은,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되는 창의와 혁신의 제1원리이지만, 그것은 바둑의 궁즉통(窮則通)의 묘리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수를 다 꿰고 있는 최정상의 내공 보유자 둘이, 바둑판이 만들어내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경우의 수들을 다 읽어가며 서로 겨룬다면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신의 한수는 그 질문을 던져놓는다.
태석(정우성)과 살수(이범수), 주님(안성기)과 량량(안시현)과 배꼽(이시영), 꽁수(김인권), 허목수(안길강), 왕사범(이도경), 양실장(최진혁)은 모두 바둑의 달사(達士)들이다. 살수를 중심으로 한 악도(惡徒)들은 태석의 형을 죽이고 그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낸다. 태석은 고통의 시간 속에서 복수를 준비한다. 무협지의 상투적 스토리를 바둑판의 싸움으로 풀어낸 이 영화는, 무척 용감하다는 느낌을 줬다. 미안하지만 칭찬만은 아니다. 가끔, 무식하면 용감하지 않던가.

바둑은 우리가 생각하는 화려한 비주얼의 액션이 나올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사실 바둑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하고 분방하며 잔인하고 질기며 허를 찌르고 혈(穴)을 급습하는 싸움은 그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광풍이며 공포이며 긴장이며 대서사시이지만, 그건 다만 내면으로 흐르는 기운일 뿐이며 그 판세를 전심전령을 다해 읽어가는 자의 ‘판타지 액션’일 뿐이다. 바둑판은 아무리 격해도 그냥 바둑판일 뿐이며, 바둑둘은 아무리 미치고 날뛰어도 그냥 흑석과 백석일 뿐이다. 감독도 이걸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둑 내부에 벌어지는 저 사나운 풍경을, 외형화할 순 없을까. 그래서 그는 폭력이 난무하고 유혈이 낭자하며 잔혹과 스피드가 뒤엉킨 ‘바둑 무협지’를 만들어내려 했다. ‘신의 한수’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오래전 피씨통신 문우 중에 ‘예고살수’라는 별명을 쓰는 이가 있었다. 그 뜻을 물어보니 바둑에서 치명적인 한수를 두기 전에, 적에게 그것을 귀띔해주는 것이라 하였다. 다음에 내가 여기를 두면 당신은 죽게 되니 미리 방비를 하시오. 이런 메시지를 미리 주는 것이니, 무척이나 훌륭한 매너를 지닌 고수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얼마전의 영화 ‘역린(逆鱗)’에 등장했던 살수(殺手)는 서양의 ‘킬러’를 옮겨놓은 말이었다. ‘신의 한수’에서 이범수가 맡은 배역 ‘살수’는 그야말로 바둑판 용어이면서 킬러의 의미까지 담은 중의법이다. 이미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殺手와 범수’라고 운을 맞춰 달기도 했다.
2014년 7월4일 본지 22면에 실린 관련 기사.

2014년 7월4일 본지 22면에 실린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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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혹한 자를 상대하는 사람은 큰 돌이라는 의미의 ‘태석(太石)’이다. 태석을 돕는 사람은, 눈이 멀어 맹기(盲碁)를 두는 파고다공원의 노인 주님, 한쪽 팔을 잃었지만 두팔 보다 더 무공이 뛰어난 왕사범, 수다스럽고 익살스러워 감초역할을 해내며 초반에 대리전을 치르는 꽁수 따위이다. 살수 쪽에는 브레인 역할을 하는 왕사범과 행동대원 역할을 하는 양실장이 있지만, 이들은 초반에 나가 떨어지는 무리다. 살수의 진정한 무기는 프로바둑에서 전향해 살수의 ‘애정없는 애인’ 노릇을 하고 있는 배꼽과, 가히 대적할 자가 없을만큼 뛰어난 천재 바둑소녀 ‘량량’이다. 태석의 무리는 량량의 기상천외한 유연함 앞에서 하나둘씩 죽어나간다. 결국 마지막 대국에서 태석을 마음에 두게된 배꼽과 소녀 량량이 눈을 맞춰 태석과의 게임을 ‘비기기’로 끝낸다. 하지만 살수의 분노는 그때부터 폭발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 뒤, 악당으로서 예정되어 있었던 최후를 맞는다.

이 영화는 장점이 곧 단점이고, 단점이 곧 가능성인 묘한 논리 고리를 지니고 있다. 바둑이라는 무형적 내재율을 지닌 혈전을, 액션이라는 유형적인 외형률로 바꿔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핵심 흥행요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바둑의 전투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좀더 드라마틱한 소통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둑판 안의 스토리는 거의 읽어낼 수 없고(아주 단순한 상황 이외에는 스토리텔링이 되지 않았다), 바둑판 바깥의 폭력과 잔혹이 겉돌며 진행되는 인상이었다. 관객들은 클로즈업된 바둑돌만 멀뚱멀뚱 바라보며, 훈수 한번도 둘 수 없는 지루한 게임의 객석에 앉아있어야 했다. 바둑이라는 동양의 오래된 게임이 지닌, 단순한 외관과 복잡한 내재율 간의 묘미가, 도저히 비주얼로 스토리텔링할 수 없는 ‘맛’이라는 것을 감독은 간과했을지 모른다. 신선이 사는 마을인 무릉도원에서 왜 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는지 아는가. 외형의 평화와 내면의 전쟁이야 말로, 신이 이 세상을 평화롭게 관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전쟁을 외형의 전쟁으로 번역해놓을 때 ‘바둑’은 신선놀음을 벗어나 인간잡기로 하강할 수 밖에 없다.

‘신의 한수’가 제시한 메시지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천재소녀 량량의 역할과 그것에 대한 해석이다. 인간이 습득할 수 있는 천하의 기량을 다 갖춘 고수라 할지라도, 아직 인간의 때가 덜묻은 인간의 유연함과 과감함과 무심함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 즉, 인위(人爲)는 천진(天眞, 하늘이 준 참된 본성, 즉 어린 아이 마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신의 한수’로 제시하고 있다. 신이 준 위대한 한수는, 아이같은 마음이 내놓는 한 점인데, 어른들은 그 경지를 그저 이용만 했을 뿐 그것에 닿지 못한 것이, 잔인과 분노와 탐욕과 증오와 질투를 낳는 비극의 원천인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그런 철학을 들이대기엔 좀 쑥스러운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살수는 그저 맹목적인 승부욕과 기계적인 살인마였을 뿐이었고 전혀 인간적인 고뇌나 사유가 없는 재미없는 악당이었다. 또 태석은 바둑 아닌 다른 복수를 했으면 더 어울렸을 법한, 바둑의 사뇌(思惱)와 몰아치는 승부의 내성적 멘탈이 뿜어나오지 않는 육체파주인공이었을 뿐이다. 태석과 배꼽의 러브라인도, 싱겁고 생뚱맞은 느낌이 있었다. 영화는 특히, 바둑을 좀 아는 남친과 팔짱을 끼고온 여자들의 지루함을 깨는 서비스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냉동실에서 웃통을 벗은 두 남자의 잘 생긴 몸매를 감상하는 것 만으로, 두 시간을 견뎌주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 영화 ‘신의 한수’ 스토리텔링은 신의 한수가 모자랐다

영화 '신의 한수'는 스토리텔링의 실험이다. '바둑'이라는 정적인 외형을 가진 지적인 게임을, 영화라는 스토리텔링에 담을 수 있을까. 바둑도 인간이 선호하는 하나의 스토리텔링 영역이고 영화도 흥행을 몰고 다니는 중요한 스토리텔링 영역이지만 두 영역이 구가하는 즐거움의 차원이 다르다. 바둑판 위에 차례로 놓는 바둑돌로 스스로의 생사를 결판짓는 바둑은 신들이 바둑 두는 것을 지켜보다가 도끼자루 썩어가는 긴 시간도 잊어버렸다는 치열한 내면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철저히 그 세계 속으로 들어온 자들만의 전쟁이며 외부에서 보면 고즈넉하고 평화롭기 짝이 없다. 소통은 그 내부만의 문제이며 단지 바둑판이나 바둑돌이나 바둑 두는 사람을 지켜보는 쪽에서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무료한 행위일 뿐이다. 영화는 흥행(興行)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기분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고 그것이 전파되고 전염되어야 하는 대중소통을 생명으로 한다. 많이 전파되면 될수록 일단은 성공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으며 가치있는 스토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바둑과 영화의, 두 개의 이질적인 차원을 하나의 스토리로 이끌어내기 위해선 바둑의 스토리를 잘 알고 있는 이의 영화적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다. 그러나 감독은 바둑과 영화 사이의 이물감을 '폭력적 긴장'으로 중화시키려 했다. 잔혹과 핏물과 추악과 흉계를 집어넣어 바둑판이 느와르처럼 긴박하게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 폭력은 바둑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유의 긴박과 처절을 살려내지 못하고, 서로 겉도는 느낌을 주고 말았다. 바둑이 영화가 되려면, 진짜 신의 한수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오래전 바둑 전문기자와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좌중으로 앉았던 몇몇 사람은 그의 입담과 절묘한 상황 전개에 매료되어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무슨 코멘트를 했을까. 바둑에서 진행되는 미묘한 양상들을, 폭력이나 혹은 전쟁 따위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치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가 진짜 생명을 얻고 감동을 뿜어내기 위해서는, 바둑 그 자체로 소통했어야 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바둑을 모르는 대중에게, 바둑이 얼마나 현기증 나는 게임의 세계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깊이있는 울림을 만들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축구를 모르는 사람에게 월드컵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방식은, 치맥을 사주며 우리팀이나 응원하라고 하는 방법이 있겠고, 축구의 몇 가지 기초적인 룰과, 감독이 작전을 벌이는 두뇌게임에 대한 약간의 팁을 주면서 재미를 발견하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신의 한수에는 뒤의 '한수'가 필요했다. 바둑을 전쟁으로 만들지 말고 전쟁을 바둑으로 만드는 묘수가,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함께 간 동행자가 한참 졸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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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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