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실험 위협과 북한과 일본의 납북자 피해자 재조사와 독자 제재해제 등 국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점에 그의 입에서 나올 말에 외국 정부와 특파원들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노 대변인은 직전에 국무총리 외교보좌관을 지냈다.그는 김황식 전 총리 때 인 2011년 총리실로 가서 외교현안을 보고하는 막중한 책무를 충실하게 소화했다. 노 대변인은 "5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왔다"면서 "앞으로 열심히 정부와 국민 간 가교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가 말한 5년은 뉴질랜드 대사에 이어 국무총리 외교보좌관으로서 본부를 떠나 있은 기간이다.
외교부 직원들은 전문 분야와 학맥 등에 따라 미국의 '워싱턴 스쿨',일본의 '저팬 스쿨' ,중국의 '차이나 스쿨' 등으로 분류한다. 노 대변인은 "저는 미국과 일본,아시아 국가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만큼 굳이 따지자면 'APEC 스쿨'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30여년의 외교부 근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여년 전 북한 핵문제가 터졌을 당시 고생한 것이다. 노 대변인은 "주미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1992년 북한 핵문제가 터졌다"면서 "당시는 북핵을 국제사회가 아니라 남북이 풀려고 할 때였다"고 소개했다. 1993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할 때였다. 그는 "국내외 정부 인사는 물론,친구 등으로부터 정보를 얻으려는 전화를 받고 메모하느라 청력이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북핵 문제는 계속 그의 뒤를 따라 다녔다. 베트남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북한 경수로 기획단에서 일했다. 경수로 기획단은 북한이 핵개발을 중지하는 대가로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기 위해 1995년 설립된 기구였다. 노 대변인은 "1998년 봄쯤 북한이 신포에 한국 마을 만들 당시 한국 자동차 운전면허증 사용, 식자재 반입,병원 운송, TV 시청과 위성통신 이용 등 한국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협의하면서 재미있게 일했다"면서 "그당시 업무가 개성공단에도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노 대변인은 '브리핑 회수를 늘려 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진지하게 고민하겠다"고 답했다. 부임 사흘째인 지난달 29일 북한과 일본이 납북자 재조사 등의 합의를 전격 발표하자 밤늦게까지 걸려온 수많은 전화를 일일이 받고 정부 입장을 조율해 발표해 합격점을 받았다.
박희준 외교·통일 선임기자 jacklondo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