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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땅에 떨어진 바통, 홀로 뛰는 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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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일 산업2부장

이정일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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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가정해본다. 저런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저런 일'이란 마이크로소프트(MS)의 권력 이양이다. 스티브 발머 MS CEO가 "12개월 내 은퇴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지난 8월. "그(은퇴) 전에 이사회가 후임을 정할 것"이라고 했으나 여전히 인선은 안갯속이다. "1차 후보군이 100여명이었고 그중 20명 내외로 압축했다"는 맨송맨송한 소식을 MS CEO 추천위원회는 최근에야 심드렁하게 들려줬을 뿐이다.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우리 기업이라면 수장이 1년 전 자신의 은퇴를 예고하는 일이 가당키나 할까. 이왕에 물러나기로 했다면 서둘러 후임을 물색하지 않을까. 저러고도 조직이 무사태평일까. 온갖 상념이 날뛰다가 문득 이 가정의 진원지인 '연말연시 인사철'로 촉수가 쏠린다. 작별하는 자와 금의환향하는 자의 행보가 교차하는 소란스러운 풍경은 올해도 어김없다.
당장 KT가 새 수장을 맞았다. 지난 16일 KT CEO 추천위원회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을 만장일치로 낙점했다. 이석채 전 회장이 물러난 지 34일 만의 속전속결이다. '미스터 반도체' '황의 법칙'이라는 명성은 일각에서 우려하는 '외풍'을 상쇄시키며 'KT 황창규호'를 출항시켰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의 신분은 '내정자'다. 주주총회를 거치지 않았으니 '무관의 제왕'이다. 출근도 본사 사옥으로 하지 않는다. 서초구 우면동 소재 KT연구개발센터에 마련된 임시 사무실이다. 월급도 받지 않은 채 업무 파악에 나섰고, 미래 전략을 짜며 조직 개편을 구상 중이다. 새해 1월27일 주주총회에서 정식 CEO로 임명될 때까지 정(情) 붙일 바로 그곳에서.

KT와 동변상련인 포스코도 후임인선을 고심하고 있다. 승계협의회에서 CEO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해 내정자를 선임하는 수순이다. 현재로선 내년 언제쯤일지 짐작하기 어렵다. 정준양 전 회장이 지난달 15일 사임했으니 KT보다는 후임 결정이 더디지만, 역시 누군가는 주총까지 내정자 신분으로 '포스코 OOO호'를 이끌 것이다.

내정자가 주총에서 부결된 전례가 없다보니 '내정자 = CEO'라는 인식도 지나친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주총에서 등기이사가 된 후 이사회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돼야 비로소 '내정자 = CEO' 함수가 완성된다. 그전까지 내정자의 활동은 비공식적일 뿐이다. 이런 비공식적인 행위를 공식화하려는 것은 조직의 위기감이요 생존의 절박함이다. 여기에 그룹 총수의 힘이 작용하기도 한다.
삼성ㆍLGㆍ현대차ㆍSK 등 주요 그룹들도 앞다퉈 CEO 인사를 단행했다. 불확실한 글로벌 경기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 새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촉박함이 작용한 결과다. 일부 내정자는 인사 다음 날 새 발령지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호칭도 이미 대표(CEO)로 바뀌었다.

흔히 경영을 계주에 비유한다. 계주에서 바통을 어떻게 넘겨받느냐가 승패를 결정하듯 기업 경영도 '부드러운 이행(smooth transition)'을 거쳐야 한다고 김상훈 서울대 교수(경영대)는 역설한다. "경기에서 바통을 잘 받으려면 넘겨주는 선수(전임)와 넘겨받는 선수(후임 또는 내정자)의 달리는 속도가 일치하는 지점이 필요하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아이젠하트 교수도 '벼랑에서의 경쟁(Competing on the Edge)'에서 비슷한 맥락을 짚었다.

애플이 스티브 잡스에서 팀 쿡으로, MS가 빌 게이츠에서 스티브 발머로 권력 이양이 무난히 이뤄진 것은 '속도가 일치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은 덕분이다. 지금 MS는 다시 그 지점을 찾는 중이다. 내정자는 바통을 너무 빠르거나 늦게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바통을 제대로 넘겨주기는 하는 걸까. 혹시라도 땅에 떨어진 바통을 집어들고 뛰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는 번번이 패할 수밖에 없다. 전임과 후임이 함께 뛰어야 하는 것이다.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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