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는 어쩌면 파티가 아니라, 죽은 시간에 대한 제사같다. 새겨야 할 기억보다 지우고 떨쳐야 할 악몽들이 더 많아야만 그게 이 나라의 보통 삶일지도 모른다. 형형색색의 폭탄주를 위약(僞藥) 복용하듯 곪아가는 속에 들이붓는 것은 어쩌면 세월을 음복하는 일이다. 지지리도 안 풀린 일들과 눈앞에 펼쳐진 암담한 풍경들을 술이란 지우개로 잠깐 백지화하는 일이다. 눈 딱 감고 화(火)들을 삼킨다.
망년(忘年)의 처음 뜻은 '내 혹시 너를 섭섭하게 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술을 한 잔 살테니 마음에 그런 기색이 있었다면 잊어버리려무나' 하는 따뜻한 배려였을지 모른다. 혹은 '살이의 부대낌으로 본의 아니게 너에게 수고를 끼쳤겠구나' 그 고마움을 뒤집어 말하는 방식으로, 한 해의 결산을 '잊음'으로 잡았는지 모른다.
정작 복잡한 세상을 살아 보니 망년은 언제나 진짜 잊고 싶은 망년들로 얼룩져 있다. 망년회들은 비장하고 비감하고 가끔 객기와 멱살잡이로 소란함을 연출한다. 모임의 끝자리는 깨끗한 잊음이 아니라, 차가운 바람이 등을 떼미는 쓸쓸한 현실로의 귀환으로 결론나게 돼 있다. 모두들 그걸 안다. 아무도 그런 쓸쓸한 프로그램을 말하지 않고, 그저 부나방처럼 술잔 주위로 모여들 뿐이다.
불어오는 찬바람, 거리마다 검은 허리를 드러내고 떨고있는 가로수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고주망태로 첨벙첨벙 건너가는 레테의 강가에서 앙상한 그림을 완성해준다. 택시들은 잡히지 않고 때마침 눈발은 흩날린다. 휘청거리는 망년취객들이 자정 넘은 길바닥에서 손을 들었다 놨다 하는 풍경은 매년 그대로다. 모두들 진짜 나를 잊었나. 망년의 끝은 처연하고 황량하다. 택시기사들은 차창을 열어 가끔 침을 뱉으며 지나간다. 거리마다 강시들이 널린 12월의 밤은 아직 잊지 못한 것들의 소리없는 비명으로 가득 찬다.
잊어버려야 할 것들 속엔, 사랑이란 물건도 끼어 있을까. 손때 묻은 지갑에 들어앉은 낡은 지폐처럼 귀퉁이가 이미 닳아버린 사랑도, 이제 곧 시간의 저편으로 우송돼야 하는 운명에 포함돼 있을까. 지난 시간 동안의 뉘우침과 그리움들도, 기억의 보퉁이 속에서 풀려나와 어디론가 실려갔을까. 어느 날 그토록 간절하게 적어올린 그리운 문자들은, 이제 소용을 잃은 영수증처럼 너덜너덜해져 읽어도 어떤 울림도 생산하지 못하는 망년의 명세에 합산돼 있을까. 꾸역꾸역 게워낸 취기 속엔 채 삼키지 못한 사랑의 뜨거운 화기가 남아 있을까.
아아, 망년. 씻어도 털어도 무언가 남는 망년. 그걸 확인하기 위해 우린 이렇듯 죽어라 마시고 죽어라 잊어보는 걸까. 결코 끊어지지 않는 세월을 단칼에 잘라내겠다, 잘라냈다, 호언하며 결국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내일로 비틀비틀 건너가고 있는 것일까.
<향상(香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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