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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선의 世·市·人] 청송(聽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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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KIKO)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의 공개변론이 열리는 대법원 대법정의 천장은 높고 아득했다. 법복을 차려입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13명의 대법관이 엄숙한 표정으로 입장해 자리를 잡자 법대(法臺)는 거룩한 기운마저 감돌아 장엄했다. 대법원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말들이 만나 결전을 치르는 곳이어서 그 모습은 최후의 만찬을 앞둔 예수와 12사도를 연상케 했다.

키코계약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중소기업이 이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긴 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이 소송에 양측의 대리인으로 5개 대형로펌이 참여하여 법정의 좌우에 포진했다. 2심까지의 판결이 사안에 따라 엇갈린 점을 의식한 탓인지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TV생중계를 허용했다. 민사사건으로는 사상 첫 사례였다. 키코의 환 헤지 적합성, 약관성, 옵션의 이론가 등에 관한 고지의무, 적합성 원칙, 설명의무, 과실상계 등을 주요 쟁점으로 삼엄한 말들의 기치가 날카롭게 맞붙었다. 원고의 이익은 피고의 손실에서 확정되고, 피고의 이익은 원고의 손실로 보장되므로 각자에게 유리한 진술과 증거, 판례들을 동원한 설전(舌戰)이 팽팽했다. 키코계약을 사기도박이라며 계약무효를 주장하는 원고와 키코를 적법한 상품으로 판매했고, 설명 의무도 다했다고 반박하는 피고 사이는 접점을 찾기에 너무 멀어보였다.
지난 9월26일 대법원장이 재판장인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은행의 키코판매가 불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원고인 기업의 상고를 일부 기각하고 일부 파기환송 조치했다. 기업들이 주장한 무효, 취소, 콜옵션 행사 포기, 사정변경에 의한 해지 등 상고이유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키코 피해기업들은 "은행의 금융사기에 면죄부를 주는 판결"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는 "정의 수호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었던 대법원마저 비겁한 금융감독원에 이어 타락한 은행들의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합법화시켜줬다"며 금감원에 대한 감사원 감사 요구권 의결 요청, 키코 판매은행에 대한 2차 형사고소, 헌법소원 등 향후 대응방안을 담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원고인 기업의 승복(承服)을 얻지 못한 대법원의 판결로 키코를 둘러싼 쟁송(爭訟)은 결국 그 전단(戰端)을 확장하게 되었다.

금융시장에서 돈으로 환치된 인간의 욕망은 목적이고 이성은 종종 무력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 욕망의 하중을 시장이 감당할 수 없을 때 금융사고는 발생하고 이는 시장의 실패로 귀결된다. 이 욕망은 측정할 수 없어 제어할 수 없으며 심판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욕망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금융시장에서는 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强凌弱)하고, 다수가 소수를 폭압(衆暴寡)하며, 똑똑한 자가 우매한 자를 사기(智詐愚)치며, 겁 없는 자가 겁쟁이를 침탈(勇侵怯)한다.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꿈꾸던 공자는 "송사를 듣고 처리함은 나도 남들과 같으나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하겠다(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며 청송(聽訟)의 궁국적인 지향점이 무송(無訟)임을 밝혔다.
키코 소송은 지금까지 440건이 제기됐는데, 202건은 1심 판결이 나왔다. 기업이 일부 승소한 것이 37건이고, 나머지 165건은 은행이 이겼다. 1심 판결이 나온 소송 중 63건은 소송당사자들이 불복해 2심을 거쳐 대법원에 올라가 있다.

설문(說文)에, 힘으로 다투는 것이 쟁(爭)이고 말로 다투는 것이 송(訟)이라 했으며, 죄를 다툼이 옥(獄)이고 재물을 다툼은 송(訟)이라고 주례(周禮)에 적고 있으니 말로써 재물을 다투는 이 송사(訟事)는 계속될 것이다.

차제에 소송을 앞둔 중소기업에게 필승의 비책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옵션이라면 치가 떨리시겠지만 그래도 '전관예우'라는 확실하고 막강한 옵션을 가진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수임료가 좀 들더라도 미리 하나 사 두시라!



정병선 성균관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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